#10. 인생은 타이밍

- 여름날의 피아노 선물

by 꼬마물고기

<오늘의 메뉴>

와플, 카페라떼


초등학교 3학년 여름. 학교를 마치고 시영아파트를 지나는데 흰 트럭에서 피아노가 내려오고 있었다.

누구의 피아노일까. 너무 좋겠다. 한 참을 넋 놓고 있는데 아저씨들이 피아노를 들고 우리 집 통로로 올라갔다.

3층 준혁이네 피아노일까. 아님 4층 가영이네 피아노일까. 한참을 뒤따라 올라가는데 5층 우리 집에 피아노가 멈췄다.

그 여름날을 잊지 못한다. 너무 좋아서 방방 뛰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 앞에서 첫 곡으로 '워털루 전쟁'을 연주했었다. 너무 행복했던 기억이라 그 날 입었던 내 옷, 엄마의 옷, 당시의 공기까지 다 기억이 난다.


살다 보면 인생은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10살의 행복한 선물을 피아노가 절실하지 않았던 9살에 받았다면, 혹 부모님이 곧 지나가는 변덕이겠지. 좀 더 있어볼까. 그러다 11살에 받았다면 나에게 그 선물은 마흔이 다되어 가는 지금까지 또렷하게 남아있지 않겠지.

가끔 늙어가는 엄마 아빠를 보면서 열 살 때 받은 피아노 생각에 더 잘해야지. 내게 모든 걸 준 것처럼 나도 더 열심히 사랑해드려야지 마음먹는다.


사랑도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예전 그 소년이 나랑 취직 시기가 같이 맞아떨어졌다면, 한 명이 사회인이 되고 한 명은 학생으로 남지 않았다면 결말이 다를 수 있다. 남편과 나도 첫 만남을 할 시기가 서로 타이밍이 맞았다. 나는 당시 직장 3년 차로 승진 말고 뭔가 다른 자극이 필요했고 남편은 해외 부서로 갈 수도 있는 시점에 연애와 결혼이 급했다. 물론 사람이 서로 맞지 않았음에 시기만 맞았다고 해서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겠지만 가끔 그 서로의 타이밍도 인연으로 연결된 중요한 힘이 된 것 같다.


지금의 공무원이란 직업도 이십 대에는 인연이 닿지 못했었다. 대학 졸업반 시절 나는 금융권에 취직할 꺼라 확신했고 운이 좋으면 한 다리 걸쳐놓은 작가 연수원에 들어가서 방송작가가 될 꺼라 믿었다. 출판사 편집부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 글이 아닌 남의 글을 읽어가며 매일을 보내는데 못난 자격지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때도 공무원을 할 생각도 없었고 그 흔한 시험 과목도 알아본 적이 없었다. 당시 내가 대학시절 때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동기들의 희망사항은 대부분 공무원이었다.

5년째 하는 동기도 있었고 1년 만에 합격해서 벌써 8급이 되었다는 동기도 생겼다. 그저 다른 세상의 직업세계였다. 당시에도 남의 원고를 받아 편집실에 앉아 나도 이 정도는 쓰는데 하면서 못난 생각만 했고, 공무원 합격자 발표날은 떨어진 친구들과 오랜만에 술을 진탕 마시는 날이었다. 애들이 서로 오답을 맞춰 가는 자리에서도 독서실은 고등학교 때 이후로 진짜 질리는 내게 그 과정 자체가 존경스러웠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전 직장에서 육아휴직을 하는 중에 복직 후 나의 일이 아이 양육과 동등하게 이어갈 수 있을까 생각했고 아이가 잠들고 새벽 2-3시까지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주말에는 남편과 친정엄마가 아이를 대신 봐주셨다. 그땐 공부가 재미있었다. 안방에 아이가 깼나 안 깼나 한쪽 귀를 방으로 두고 한 귀를 인강 소리를 들으며 한정된 시간 내에 하는 공부는 진정 배움의 시간이었다.

으아. 벌써 새벽 3시야. 지금은 자야 내일 밥 먹여 등원시키겠지. 면접에 불합격해도 괜찮아. 여기 온 것만도 나 대단했지. 나 진짜 공부가 즐거웠어. (갓난쟁이 육아보다 공부가 훨씬 즐겁지. 역시 애 보는 일하느니 밭일하겠다는 심정을 알았달까) 당시 면접도 당연히 떨어진다 생각하고 즐겁고 편안하게 봤다. 불합격해도 남편이 선물해준 정장, 구두, 가방은 생겼으니 그것도 즐거움이었다.


지금은 공무원(워라벨은 대체 누구의 이야기인가요? 칼퇴한다는 공무원은 대체 어느 부처인가요?) 보다 차라리 전 직장에 남았다면 아이와 더 시간을 보냈을 텐데 후회도 하지만 아무튼 생각도 못한 직업의 세계도 내 인생 한 부분의 타이밍이 맞아 이어지게 되었다.


사람의 인연도, 물건도, 일도 서로의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내가 원했던 회사에 계속 떨어지면 나는 내가 모자라다 생각하기보다 이번 생은 여기랑 내 타이밍이 맞지 않구나. 어쩔 수 없지. 물러났다. 발을 동동 구르고 모자란 나를 원망하고, 내 능력을 미워한들 그 인연은 이어질 수 없으니 차라리 타이밍 탓을 하는 게 훨씬 감정 소모 덜 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열심히 하지 말자 손을 놓는 건 아니고, 그래도 내 마음이 식기까진 노력해봐야지. 된다면 정말 좋은 일이고, 실패한다면 뭐 그땐 내 마음이 식겠지.


오래된 연인과 헤어지고 각자 다른 사람과 1년 만에 결혼한 예전 친구 커플을 보면서 8년의 시간도 서로의 타이밍 앞에 어쩔 수 없구나. 물론 모든 오래된 연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8년 교제 후 가족 같던 남자와 헤어진 친구는 오히려 후련하다 했다. 진짜 많이 사랑해줬고 사랑받았으니 후련하다.

그때 말주변이 없던 내가 타이밍이 안 맞아 그래. 너랑 그 애랑 타이밍이 안 맞을 뿐이야. 곧 나타날 거야. 너랑 타이밍이 딱 맞는 남자가.

후에 친구가 자기가 헤어지고 주변 지인들에게 위로받고자 털어놓으면 다들 상대의 욕, 둘의 너무 긴 연애 기간 등을 탓했다고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은 왠지 모자란 그의 탓을 했고, 모자란 자신의 탓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너희 인연이 거기까지 였지. 타이밍이 안 맞았어. 하니 그냥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서로의 연이 끝나서 그렇구나. 마음이 편했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지금이 늘 중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지금 행복해야 해. 지금 가져야 해. 지금 가봐야 해. 지금 먹어봐야 해. 지금 내가 원할 때. 지금 내가 그것과 타이밍을 맞춰보고 싶을 때.

물론 미래의 즐거움을 미리 빼어 쓰는 건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지만, 10살의 피아노가 일주일만 늦었어도 행복은 덜 했을 것 같단 믿음이 있어 지금 내 감정에 충실하고자 노력한다.

누군가를 잃었다면, 뭔가를 가지질 못했다면 내가 늘 하는 말을 떠올려보길. 그것과 (그 사람과) 내가 타이밍이 안 맞을 뿐이야. 누구의 잘못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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