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등원시키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겨울 특유의 사이다 같은 공기 바람이 코 속으로 들어온다. 좋아하는 계절은 아니지만, 그래도 겨울이 왔네.
이맘때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나 홀로 집에'시리즈라고 했지만, 나는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다. 내가 중, 고등학교 시절 일본 문화가 유입이 막 활발하게 시작되던 시기였다. 음악, 영화, 드라마, 만화 등 지금 생각해보면 해적판이라고 해서 불법적인 경로로도 마구 쏟아졌다. 그렇다고 해서 떳떳하게 '나 요즘 일본 만화나 드라마 보고 있어.' 말할 수 있는 시대적 분위기도 아니었다. 나는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특히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러브레터를 시작으로 관심 있게 기다렸던 것 같다. 돌아보면 감수성 예민한 소녀들의 마음을 제대로 건드려 출렁이게 만드는 감독이었다.
소개: “가슴이 아파 이 편지는 차마 보내지 못하겠어요.” 첫사랑을 잊지 못했던 그녀, 와타나베 히로코 “이 추억들은 모두 당신 거예요.” 첫사랑을 알지 못했던 그녀, 후지이 이츠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중학생 때, 학년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르고 겨울 방학을 앞두고 비디오를 보게 해 주시는 교과 선생님들이 계셨다. 2학기 기말고사를 치기 위해 이미 교과서 진도를 모두 나가서 2주 정도의 시간이 남아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도 지겨워지면 선생님께서는 반장에게 다음 시간에 볼 비디오를 하나 빌려오라 하셨다.(학급비로 대여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반장이었던 친구 경화를 데리고 하교 후 비디오 방에 가면 괜히 옆에서 나랑 차차가 우리 취향의 비디오를 선택하게 은근히 입김을 불었다. 그때 본 비디오가 '러브레터'였다.
사실 반 친구들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딱 한번 소년 후지이 이츠키가 바람 부는 커튼 앞에서 책을 보던 장면에 "까악 까악" 소리 지르더니 몇몇은 옆 드려 잠들었다.
(커튼 장면은 한 50번 되감기로 반복했던 것 같다. 되감기 할 때마다 교실은 까마귀 소리가 났다.)
노곤하게 석유난로가 타닥타닥 타는 소리도 좋았고 취향이 아닌 친구들이 잠든 사이에서 몇몇이 숨죽여 봤다. 당시 열다섯의 나는 눈 덮인 산에서 소년 후지이 이츠키가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펜팔 문화가 유행했던 시기였다. 내가 중학생 때 컴퓨터란 교과목이 생겼고 숙제로 이메일 주소 하나 만들어 오기가 생겼었다. 이 글을 읽으며 ' 사람 도대체 몇 년 생이야. '하겠지만 아마 공감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테다.
마니또 놀이도 은근 학창 시절 추억으로 많이 남아있고 결혼 전 짐 정리를 하다 그 시대 주고받았던 편지도 제법 나왔다. 봉투에 적힌 그 이름들이 다 생각나진 않아 이상하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이메일이나 SNS가 정감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번진 잉크 자국처럼 마음을 긁는 간지러움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겨울 산에서 사라진 약혼자를 잊지 못해 편지를 보낸 히로코와 그 소년이 사랑했던 이츠키의 편지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1인 2역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 톤이나 인물의 상반된 성격도 잘 살려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 약혼자가 겨울 산에서 사라져 버리고 그의 친구와 새로운 시작을 하지만 늘 그를 한편에 그리워한다. 장난스럽게 보낸 편지가 그와 이름이 같던 여자 이츠키에게 도착한다. 엉뚱한 시작으로 히로코에겐 사랑인지 죄책감 일지 모르는 감정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고, 이츠키에겐 잊고 있던 학창 시절의 소년 이츠키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여자 이츠키 역시 가족 간의 모른 척했던 앙금들이 정리되게 하는 계기가 된다.
편지로 시작된 두 여자의 만남이지만 결국 소년 이츠키로 인해 각자의 삶에도 변화가 생긴다.
우리 시대에는 익숙한 도서관의 '도서 열람 카드'가 있다. 빌려간 날짜와 반납한 날짜, 대출한 사람과 그것을 확인하는 도서위원의 서명이 들어가 있다. 지금은 바코드로 모든 게 신속하게 처리되는 시대지만 당시에 도서 맨 뒷 장 봉투에 이 책을 거쳐간 사람들의 기록들이 각기 다른 글씨체로 남겨져 있었다. 지금은 신기할 시대적 요소가 남아있어 가끔 이 영화를 보면 아날로그 감성이 되살아 난다.
나처럼 겨울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잊힐 만하면 무심코 텔레비전에서 나왔다.
불 꺼진 거실에서 하얀 눈 밭을 보면 갑자기 코 끝에서 두통이 올 것 같은 석유난로 냄새가 왔고 교실 안에서 옆 드려 자는 친구의 숨소리도 간간이 들리는 것 같았다.
도서 열람 카드도 희미하게 기억났다. 이 영화를 보고 나는 문학소녀라는 간질 한 별명도 얻었다. 소년 이츠키처럼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을 골라 열심히 대여했다. 그때가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졸업까지 일주일에 2-3권씩 빌려봤던 것 같다. 대부분 스티븐 호킹의 책이었다. 영화 속 제목도 찰떡같았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한 동안 읽었었다. 내 관심 분야와 멀었지만 소년 이츠키처럼 아무도 보지 않던 책만 골라 읽었었다. 그때 나는 이과가 아니라 문과가 맞다는 것도 스스로 알게 되었다.
겨울 산에서 사라져 버린 소년 이츠키는 과연 첫사랑 소녀 이츠키를 잊지 못해 그녀와 닮은 히로코와 약혼했을까. 열 다섯 당시에는 그런 소년 이츠키가 야속하고 히로코가 불쌍했었다. 이 영화를 겨울마다 보고 그때마다 나이가 들어보니, 그런 것 역시 사랑이었겠지 그런 마음이 든다. 얼굴이 아무리 닮았다 한들 히로코의 인간적 요소에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면 약혼까지 했을까. 모두가 같은 마음은 아니겠지만 열다섯에 생각했던 결혼의 결심이 생각 보다가 단순하지 않고 쉬운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아는 나이가 되었다.
마지막에 여자 이츠키가 소년 이츠키의 도서 열람 카드를 도저히 보내지 못하고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히로코에겐 이제 죽은 약혼자를 잊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갈 것이고, 여자 이츠키는 가족 간에 차마 풀지 못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오해가 풀렸을 것이다. 서로 다른 풀지 못한 고민이 뒤늦게 나타난 소년 이츠키 존재로 인해 결국 치유된다.
아무 말 없이 사라져 버린 소년 이츠키는 영원히 교복 입은 고등학생으로 남았다.
가끔 후반부에 히로코가 "오겡끼데스까"하고 겨울 산에서 외치면 열다섯의 교복 입던 아이들이 생각났다.
타닥타닥 석유난로 타는 냄새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열다섯의 너희 들은 잘 지내니? 살다 보니 그때만큼 세상이 아름다운 것도 아닌 것 같고 매번 소년 이츠키 같은 아련한 추억만 생기는 것도 아녔겠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건강하게 잘 지내길. 겨울 산에서 사라진 소년 이츠키도 영원히 잘 지내고 있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