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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그림자 Oct 01. 2023

나이와 경험이 번역에 미치는 영향

“고모, 이게 웬 일이야?” 

“뭐가?” 

“위에서 보니까 고모 머리에 흰머리 엄청 많아.” 

“뭐? 작년만 해도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맙소사, 고모. 머리가 너무 추해.” 

“추… 뭐? 야, 사람이 다 나이가 들면 흰머리도 나고 그러는 거지. 추하긴 뭐가 추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조카가 바닥에 앉은 나를 보며 대뜸 흰머리 공격을 해 왔다. 자기는 평생 안 늙을 줄 아나? 흰머리가 추하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나 스스로도 나이를 먹는 게 썩 반갑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일모레 오십 줄에 들어서기 직전, 마침 반가운 뉴스가 들려왔다. ‘한국식 나이’가 폐지되고, 2023년 6월 말부터 ‘만 나이’로 나이 계산법이 통일된다는 그 기쁜 뉴스. 덕분에 40대를 적어도 1년은 더 누릴 수 있게 됐다.


 나는 베이징으로 어학연수를 가서야 중국도, 일본도 만 나이를 쓴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엄마 뱃속에서 약 1년을 살았으니 나면서부터 한 살이란 우리나라 셈법이 일리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나이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얼른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들뿐이지 않을까. 


‘나이 들어가는 내가 좋다’ 

뭐, 이런 감성 문구로 늙어가는 걸 아름답게 포장하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서른 살만 넘어도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 가는 게 반갑지 않게 느껴진다. 겉모습이 달라지는 것도 문제지만 결국 확률적으로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뜻이니 딱히 나이 먹는 게 좋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밸런스 게임 하나 해 볼까? 두 사람 중에 한 명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어. 한 사람은 돈이 겁나게 많아. 근데 반드시 1, 2년 안에 죽는 80대의 부호야. 그냥 부자도 아니고 무려 부호. 근데 또 다른 사람은 가진 건 별로 없지만 머리도 좋고 재능도 많은 20대 젊은 대학생이야. 넌 누구의 인생을 선택할래?”

“글쎄, 돈이 오지게 많은데 곧 죽어야 하는 부호랑 젊고 능력은 있지만 아직 가진 게 별로 없는 젊은이라……. 굉장히 고민되는데.” 


언젠가 대학 시절 베프와 이런 밸런스 게임을 한 적이 있다. 친구도, 나도 살면서 돈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아는 나이가 됐지만 ‘80대 부호를 선택하겠다’는 대답은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 100명에게 물어도 대체로 비슷한 반응일 것이다. 고등학생 조카에게도 물으니 당연하다는 듯 20대 젊은이를 선택했다. 그만큼 젊다는 게 좋다는 뜻이고, 젊음 자체에 수많은 기회와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서겠지. 


하지만 책을 오래 번역하다 보면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이 많을수록 번역에 훨씬 유리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내가 1년차 때 했던 번역과 지금 18년차에 한 번역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아주 눈에 띄게 드러난다. 단순히 띄어쓰기나 맞춤법을 맞추는 데에 능숙해진다는 게 아니라 흔히 말하는 행간을 읽는 번역이 가능해진다고나 할까. 


그럼 ‘행간’이란 뭘까? 행간은 다름 아닌 글의 줄과 줄 사이를 가리킨다. 당연히 줄과 줄 사이는 아무 것도 없는 여백일 뿐인데 행간을 읽는다니, 그것은 바로 작가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겨 놓은 의미까지 번역가가 찾아낸다는 뜻이다. 


본래 한 작가의 작품은 단순한 텍스트의 나열로 이뤄져 있지 않다. 그 책의 장르가 소설이든 에세이든 교양서든 과학서든 작가가 온힘을 쏟아 부어 집필한 책에는 그의 다양한 경험이 녹아 있으며, 그가 쌓아 온 모든 지혜가 담겨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나 문학과 관련된 책을 보면 종종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박완서 작가님의 초기 작품을 보면…….”이라든지 “박완서 작가님의 중기 작품에는…….”라거나 “박완서 작가님의 말년 작품의 주제는…….” 같은. 


사람들은 어째서 굳이 한 작가의 작품을 초기, 중기, 말년의 작품으로 나누는 걸까? 그건 작가가 젊었을 때와 원숙해졌을 때, 나이를 많이 먹었을 때의 경험과 생각이 점차 달라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나이를 먹을수록 글을 쓰는 숙련도는 물론이고, 삶의 경험도 쌓이게 마련이다. 이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문체나 소재, 주제 등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런데 어떤 작품을 번역할 때 작가의 문체나 표현 방식이 직관적인 경우에는 큰 상관이 없지만 유난히 함축적인 경우에는 번역가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유능한 번역가는 단순히 한 문장 한 문장을 옮기는 사람이 아니라 한 문단, 한 챕터, 하나의 책을 꿰뚫는 문맥을 파악하고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줄 안다. 그래야만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뜻을 왜곡하지 않고 올바르게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서투른 번역가는 책 속의 한 문장, 한 단어에 집착하다 글을 읽는 주체인 독자가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번역문을 만들고 만다. 


2012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저작권 보호 기간이 끝나자 한동안 그의 작품들이 물밀듯이 재출간된 적이 있었다. 헤밍웨이의 대표작인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도 당시 한꺼번에 여러 출판사에서 재출간됐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일부러 서점에 들러 몇 권의 《노인과 바다》를 찾은 다음 1페이지 첫 줄의 번역문을 비교해 본 적이 있다. 굳이 그렇게 한 것은 같은 번역가로서 각각의 판본마다 어떤 차이가 있을지 괜히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He was an old man who fished alone in a skiff in the Gulf Stream and he had gone eighty-four days now without taking a fish.’ 원서의 이 첫 문장을 두고 여러 번역가들은 각자의 해석대로 다음과 같은 번역문을 선보였다. 


‘그는 멕시코 해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 


‘그는 걸프 해류에서 조각배를 타고서 혼자 낚시하는 노인이었고,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날이 이제 84일이었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만 돛단배로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그는 작은 배를 타고 멕시코 만류에서 혼자 고기를 잡는 노인이었다.’ 


분명 같은 원문을 놓고 작업했음에도 번역가들의 번역문이 이렇게 조금씩 다른 것은 참 신기하고도 흥미로운 일이다. 당연히 어느 번역가의 번역문이 더 좋다고 말할 순 없지만 이런 간단한 비교만으로도 번역가에 따라 번역이 달라진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또한 이렇게 미묘하게 달라지는 번역문에는 번역가의 나이와 경험이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나이가 든 번역가만이 좋은 번역을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를테면 10대나 20대의 작가가 쓴 젊은 감각의 책은 당연히 그 나이 또래의 감수성과 문화를 이해하는 젊은 번역가가 훨씬 효과적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얼마나 많은 책을 번역하고, 어떤 다양한 경험을 했는가가 번역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이는 반복된 작업을 통해 사람의 실력이 발전하고, 갖은 경험을 통해 판단력과 통찰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여러 방면에서 노련해진 번역가는 글 속에서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할 줄 알며, 글의 뉘앙스까지도 번역해 낸다. 젊은 나이의 천재 작가는 가끔 있어도 젊은 나이의 천재 번역가는 거의 없는 이유도 바로 나이와 경험이 번역에 그만큼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많은 경험과 더불어 일 년에 몇 권씩 꾸준히 책을 번역하며 나이 들어가는 건 꽤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머리에 서리가 앉고 눈가와 입가에 주름이 늘어나는 건 늘 못마땅하지만. 지금보다 더 좋은 번역을 하는 번역가가 될 수 있다면 늙어가는 내 모습도 적당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번역할 책을 펼칠 때면 늘 생각한다. 나는 작가와 글로 교감해 그가 행간에 숨겨둔 의미까지도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 번역가일까? 나는 문장이 아니라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빠짐없이 온전히 건네 줄 수 있는 번역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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