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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Nov 09. 2019

팔라펠 (Falafel)

채식주의자를 위한 정크푸드

의외로 자주 떠올라

팔라펠 샌드위치. 내가 배고플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아니다. 하지만 적당히 가볍고 그러면서도 맛있는 것이 먹고 싶을 때 의외로 자주 떠오르는 음식이다. 구체적으로는 회사에서 아침부터 정신노동을 하느라 초콜릿 같은 간식거리를 불가피하게 집어먹는 바람에 배가 그리 고프지는 않지만, 그래도 점심시간이니 끼니는 때워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도 있으면서 적당히 포만감도 있고 조금은 건강하기까지 한 음식이 먹고 싶을 때 생각난다. 물론 미국 사람들은 샐러드를 참 좋아해서 점심시간이면 샐러드 가게에 엄청나게 줄을 서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샐러드로 끼니를 때운다는 것은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심지어 어제는 마음을 먹고 샐러드를 좋아하는 동료와 함께 샐러드 가게에 픽업하러 갔다가 마지막 순간 참지 못하고 "미안, 그런데 나 다른 데 가서 픽업해도 될까?"라고 양해를 구하고 결국 팔라펠 샌드위치를 픽업해 왔다. 그리고 자리에 돌아와 우적우적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내가 이 낯선 음식을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여행에서 한번 먹어보고 잊은 음식

팔라펠은 중동/이스라엘/북아프리카 지역 음식으로 콩 - 병아리콩(chickpea) 또는 fava beans - 을 다져서 미트볼 또는 동그랑땡 같은 모양으로 튀겨낸 음식이다. 팔라펠을 설명하는 표현 중 가장 직관적인 것은 '채식주의자를 위한 정크푸드'라는 것이다. 내가 이 음식을 처음 접한 것은 아마도 직장생활 3년 차인가에 떠났던 이집트 여행에서였을 것이다. 카이로 어딘가의 전통시장에서 가이드에게 '이곳에서 즐겨 먹는 길거리 음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골목 한쪽에서 튀겨 팔고 있는 팔라펠을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감상은 '음 여기 사람들은 이런 걸 사 먹는군요' 정도였던 것 같다. 엄청 맛있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맛없는 것도 아니고 그랬다.


당시 이집트 시장 팔라펠 가게의 분위기는 대략 이런 느낌


미국에서 팔라펠과 재회하다

이후 팔라펠을 내 주변에서 찾아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미국에 오면서부터였다. 내가 사랑하는 샤왈마 고기 냄새에 이끌려 레바논 음식점 같은 곳에 가보면 고기 메뉴 이외에 항상 팔라펠 메뉴가 있었다. 채식주의자들이 많아 레스토랑에는 채식 메뉴가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 미국이다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팔라펠을 즐겨 찾는 유태인들과 아랍, 북아프리카에서 온 미국인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유학시절 동네에 Falafel Palace라는 곳이 있었다. 보스턴 토박이인 벤 에플렉과 맷 데이먼이 자주 찾았던 곳이라고 알려져서 궁금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인터뷰 기사에 '벤 에플렉은 인터뷰를 마치고 팔라펠 팰리스를 향해 유유히 걸어갔다' 같은 내용도 어딘가에 있다. 찾아보니 지금은 문을 닫은 듯하다). 감상은? 뭐 나름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음에도 생각나고 다시 꼭 찾고 싶은 그런 맛은 아니었다.


벤 에플렉과 맷 데이먼이 즐겨 찾았다던 팔라펠 집


런던에서 팔라펠 맛에 눈을 뜨다

잘 다니던 직장을 뛰쳐나와 가난한 유학생이 되었던 시절, 런던에 며칠간 무리해서 다녀올 일이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가져간 단벌 양복을 입고 나가 계획했던 미팅을 한 후, 딱히 가시적인 소득 없이 돌아오던 길이었다. 길거리에 팔라펠 샌드위치를 파는 스탠드가 눈에 들어왔다. 저걸로 저녁 요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가장 기본 팔라펠 샌드위치를 시켰다. 비교적 젊은 아랍인으로 보이는 주인장이 기름솥에서 방금 튀긴 팔라펠을 꺼내 피타에 싸서 포장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에게 건네주기 직전에 깨달았다. 아뿔싸, 내가 현금이 1원도 없구나... 내가 현금이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카드 되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안된다고 했다.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주인이 말했다. '옷도 잘 차려입고 멀쩡한 사람 같으니, 그냥 가시고 다음에 와서 내세요.' 이렇게 계획에 없던 무전취식 take out을 성공한 나는 이윽고 방으로 돌아왔다. 팔라펠 샌드위치는 아직 따뜻했다. 한입 베어 먹으니 - 아니, 이거 맛있잖아! 방금 튀긴 신선한 팔라펠이라 그런지, 미국에서 보던 눌리고 큼직한 팔라펠이 아닌 동그랗고 앙증맞은 사이즈여서 그런지, 아니면 빵과 소스 등 조화가 잘 되었는지 몰라도 이전에 먹던 팔라펠 샌드위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이 음식에 대한 큰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지 내게 매우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배고프고 지친 상태에서 방금 튀긴 무언가를 먹은 것이기 때문에 맛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확실히 팔라펠 자체의 맛도 더 좋았다. 이 팔라펠은 베어 물은 안쪽이 색깔이 선명한 녹색이었다. 미국에서 먹던 팔라펠은 안쪽 색깔이 그냥 특색 없는 갈색이었던 것 같은데, 뭔가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다음 날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어야 해서 미안하게도 팔라펠 스탠드 사장의 호의에 보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내 머릿속에 팔라펠 샌드위치가 들어왔다.


런던에서 먹었던 팔라펠 샌드위치가 내 머릿속에서 미화된 버전


다시 미국에서 팔라펠을 찾아

미국에 돌아와서는 가끔씩 런던에서 먹은 팔라펠 샌드위치의 맛이 생각나서 몇몇 레스토랑에서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나 이렇다 할 성공은 없었다 (이거다 할만한 맛있는 팔라펠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한참 동안 팔라펠을 먹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다시 팔라펠 생각이 났다.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 한 끼라도 좀 줄이자는 생각 30%와 런던에서 먹었던 맛있는 팔라펠을 다시 한번 찾고 싶다는 생각 30%, 그리고 동네에서 새로운 메뉴/맛집을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 40%가 모여 DC 근처의 팔라펠 집을 뒤져 보았다. 오픈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두 곳의 팔라펠 가게가 꽤 좋은 평을 받고 있었다. 한 곳은 중동/이스라엘 현지의 정통 팔라펠을 저렴한 가격에 파는 hole-in-the-wall (매우 허름하고 작은 식당을 일컫는 말)이었고 다른 하나는 뉴욕에서 꽤나 인기를 끈 후 DC에 첫 매장을 연 힙한 팔라펠 전문점이었다.


첫 번째 가게는 앉는 자리는 없고 서서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이 두 개 정도 있는 작은 곳이었다. 현지인 분위기가 불씬 풍기는 과묵한 주인장과 캐셔, 주방 보조 셋이서 일하고 있었는데 벽에 걸린 사진들,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이국적인 음료수들,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우 로컬스러웠다. 무엇보다 라펠 샌드위치 가격이 무려 3-4불이었다 (기본 3불에 허머스 추가하면 4불). 미국에서 3-4불짜리 샌드위치를 찾을 수 있는 곳은 편의점 말고는 없다고 보면 된다. 보통 음식점에서 파는 샌드위치 가격의 절반 또는 그 이하인데 그만큼 가격 책정이 파격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식사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인근의 조지타운 대학의 학생들이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아마도 현지 음료수인 것 같은 이국적인 음료수 하나를 주문해서 스탠딩 테이블에 자리를 잡아 팔라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곧이어 나온 팔라펠 샌드위치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적당한 사이즈에 (일반적인 미국 1인분 사이즈보다 작았다. 사이즈도 좀 더 본토 스타일에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튀겨진 팔라펠이 중동 쪽 특유의 얇고 건조하고 담백한 피타에 잘 싸여 있었다. 팔라펠을 베어 물자 안쪽에 선명하지는 않지만 녹색이 보였다. 바삭하면서도 고소한 콩 맛이 잘 느껴졌다.


비좁은 가게에 서서 간단히 끼니를 때우거나 테이크 아웃하는 대학생들
적당한 크기의 맛있는 팔라펠 샌드위치였다

 

DC에서 처음으로 맛있는 팔라펠 집 찾기에 성공하고 나니 다른 한 곳도 반드시 가 보고 싶어 졌다. 이 곳은 뉴욕에서 건너온 체인이어서 그런지 브랜딩이나 인테리어 같은 것들이 좀 더 힙스터스러웠다. 그에 맞게 가격대도 앞 집의 두 배 이상이었지만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 곳은 토핑 종류와 팔라펠 자체에 선택의 폭이 넓게 주어졌는데, 여기서 드디어 녹색 팔라펠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이 집은 안쪽이 녹색인 팔라펠과 붉은색인 팔라펠 두 가지 중 선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전자는 파슬리 및 녹색 허브가 첨가되어서 속살이 녹색이었고 후자는 Harissa (북아프리카 스타일의 고추장) 양념이 되어 있어서 붉은색이라는 것이었다. 나의 뇌리에 강하게 남은 런던 팔라펠의 기억이 있기에 당연히 녹색 팔라펠로 선택했다 (추후 알아본 결과 이 녹색 팔라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파슬리 등 녹색 허브를 추가해서 그렇다는 쪽과 팔라펠 재료로 chickpea 대신 Fava bean을 사용하면 재료의 색상 때문에 녹색 팔라펠이 된다는 쪽이 있다. 녹색 팔라펠이라도 그 명도와 채도가 제각각인 것을 볼 때 두 방법 모두가 따로 또 같이 사용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도 즐겨 먹는 음식이어서인지, 유태인 모자를 쓴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녹색 팔라펠과 폭신한 피타, 감칠맛 나는 소스의 조화

이 집의 팔라펠 샌드위치는 기대했던 만큼 맛있었다. 베어 물면 선명한 녹색이 보이는 바삭하고 담백한 팔라펠에 각종 신선한 야채 및 감칠맛 나는 소스, 폭신한 피타까지, 로컬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요즘 미국 스타일로 맛있게 만들어낸, 내 취향을 잘 저격하는 맛이었다. 레스토랑에서는 다양한 야채 토핑을 제공하며 vegan + 건강한 음식 느낌을 내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사실 콩 베이스라고는 해도 튀긴 음식이고, 소스가 많이 들어가서 이게 그리 건강한 음식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채식은 채식이고, 굳이 그 사실을 생각하지 않아도 가끔 먹고 싶을 만큼 맛있는 샌드위치였다.


안타깝게도 두 곳 모두 내 생활 반경에 있지 않아서 자주 먹을 수가 없다. 팔라펠은 적어도 내게는 잘하는 곳과 보통인 곳의 차이가 확실히 나는 음식이어서 잘하는 팔라펠 집 하나쯤 내 주변에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회사에서 점심으로 적당히 가볍고 그러면서도 맛있는 것이 먹고 싶을 때 생각보다 자주 떠오르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동물성 단백질 섭취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한 끼 식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채식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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