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을 치고나서야 보인것

by 회색달


그 시간들은 마치 깊은 바다 밑바닥 같았다. 아니, 바다 밑바닥보다 더 어둡고 차가운 곳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매일 밤 눈을 감을 때마다 찾아오는 압박감은 정말이지 지독했다. '내일 아침에도 눈을 뜰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 불안감이 나를 잠식했다.

그렇게 불안에 질식당한 채,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묶여 있었다. 이루지 못한 시간들은 쓰레기처럼 쌓여만 갔고, 나는 그 냄새에 질식해갔다.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도 내가 발견한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무엇이든 잘하려고만 했었던 나'였다. 어릴 때부터 늘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실수하는 건 죄악이라고 생각했고, 실패는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늘 가면을 쓰고 살았다. 괜찮은 척, 능력 있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진짜 내 모습은 깊숙이 숨겨두고,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발버둥 쳤다. 그게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었다.


잘해야만 사랑받고, 잘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압박감 속에서 나는 점점 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두 번째로 마주한 건 '반복된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나'였다. 잘하려고만 발버둥 쳤지만, 현실은 늘 실패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괜찮은 척했지만, 실패가 반복될수록 가면 뒤의 나는 점점 더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실망감, 나 자신에게 느끼는 한심함,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이 나를 덮쳤다. 결국 나는 더 이상 일어설 힘조차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세상 모든 끝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앞으로 나아갈 길도, 뒤돌아갈 용기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박제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를 마주했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진 건 비참함 그 자체였다. 내가 꿈꿨던 성공적인 모습, 행복한 내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보인 건 오로지 절망과 비참함에 짓눌려 고개를 떨구고 있는, 초라한 내 등의 모습뿐이었다.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온몸에서는 실패의 냄새가 진동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저 등짝을 외면하고,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싶었다. '이건 내가 아니야'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 비참한 등짝은 분명 나였다.


내가 겪었던 모든 실패와 좌절, 그리고 그로 인해 무너져 내렸던 나의 조각들이 모여 만들어진, 그 시간 속의 나.


그때, 아주 희미하게, 나에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또렷해졌다. 그건 바로 '괜찮아'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숨조차 쉬기 힘들었던 나,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나, 반복된 실패에 주저앉아버렸던 나. 그 모든 시간 속의 나는 분명 존재했고, 그 시간들을 통해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결과였다. 그 시간들을 부정하는 건, 결국 지금의 나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실패와 슬픔, 비참함을 겪었던 그 나도 결국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자책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왜 그때 더 잘하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쉽게 무너져버렸을까 하고 스스로를 탓하는 대신에, 그저 그 시간 속의 나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차갑고 어두운 바닥에 주저앉아 떨고 있는 나에게.


그때 나는 어쩌면 두려웠을 것이다. 세상의 시선이,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래서 더 움츠러들고 숨어버렸을지도 몰를일이다. 그런 나에게 지금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따뜻한 위로와 격려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했다. 과거의 내가 홀로 어둠 속에 앉아있는 모습을. 그리고 지금의 내가 조용히 그 옆으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는 모습을.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힘들었지?' 하고 나지막이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다, 그럴 수 있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하고 토닥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실패를 마주한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목을 잡히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기도 할터다. 그런 실패를 겪을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책하기 쉽다 '내가 부족해서', '내가 형편없어서'라고 생각하며 자존감을 깎아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실패 속에는 분명 우리가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무언가가 숨어 있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고 다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물론 실패를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특히나 그 실패가 내 존재 자체를 흔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는 더욱. 하지만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실패를 겪고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나'도 분명 나라는 존재의 소중한 부분이라는 것을. 그 시간들이 나를 만들었고, 나를 지금의 모습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더 이상 스스로를 외면하거나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과거의 실패 때문에 괴로워하는 네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기로했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어깨를 토닥여주기로했다. 그 모든 아픔과 슬픔을 겪어낸 너는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하기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져 있던 비참한 등짝의 나를 이제 수면 밖으로 꺼내기로 다짐했다. 더 이상 숨기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안아주기로. 실패했던 나, 아팠던 나, 주저앉아 있던 나. 그 모든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나의 새로운 이야기는 시작될 거라고 믿으니까.


부디, 자기 안의 아픈 '나'에게 먼저 다가가 손 내밀어 줄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괜찮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그 모든 실패 속에서도 너는 충분히 가치 있고 소중한 사람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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