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노트북 화면 앞에 앉아

by 회색달

어김없이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몸은 지쳤지만 머릿속은 멈추지 않았다. 단주를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고, 병원 상담과 단주 모임에도 나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 어딘가는 허전하고 공허했다.


술 없이 버티는 하루하루는 마치 감정이 벗겨진 살갗처럼 생생했다.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며, 내 안을 어지럽혔다. 외로움, 수치심, 분노, 상실감… 이 모든 감정들이 마치 엉킨 실타래처럼 내 안을 짓눌렀다. 숨쉬기조차 버거울 때가 많았다.



어떤 날은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몇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텅 빈 방 안에서 들려오는 건 오직 내 심장 소리뿐.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오히려 더 외로웠다. 이 감정들을 어디에 쏟아내야 할지,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마음은 늘 불안정했고, 작은 일에도 쉽게 흔들렸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 있는 작은 배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언제 뒤집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옥죄어왔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무언가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이 감정들을 받아줄 무언가, 나를 이해해 줄 무언가, 아니, 적어도 나 스스로가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무언가가 절실했다. 잠 못 이루는 밤마다,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었다. 내 안의 소용돌이를 잠재울 작은 불씨라도 찾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나를 계속 움직이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써볼까?”


하지만 곧 주춤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워드 창을 열었지만, 손은 멈춘 채 깜빡이는 커서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릿속은 온통 백지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수십 번 창을 열었다 닫았고, 아무 말도 쓰지 못한 채 노트북을 덮은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멀리 보이는 창밖 밤하늘은 고요했고, 그 고요함이 나를 더 작아지게 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어렵지?”

한 문장을 쓰는 일이 이렇게 막막할 줄은 몰랐다. 술 없이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데, 이제는 글까지 쓰려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욕심 같았다. 내 안의 비판적인 목소리가 속삭였다. '네가 뭘 안다고 글을 써? 누가 네 얘기에 관심이나 있을 것 같아? 어차피 아무것도 못 할 거야.' 그 목소리는 너무나 강렬해서, 키보드에 손을 올리는 것조차 두렵게 만들었다. 한 단어를 입력하는 순간,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람인지 드러날 것만 같았다. 수치심과 무력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희미한 열망이 있었다. 언젠가 내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는, 그리고 지금 이 삶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는 마음. 이 막연한 열망은 마치 어둠 속의 작은 불빛 같았다. 꺼질 듯 말 듯 흔들리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나를 붙잡았다.


어느 날, 단주 모임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냥 아무 말이라도 써보세요. 좋아 보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일단 써야 시작이 돼요.”


그 말에 조용히 용기를 얻었다. 텅 빈 화면 앞이 아니라, 텅 빈 나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생각으로 키보드를 눌렀다. 망설이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오늘은 참 외로운 하루였다.”


그 문장이 시작이었다. 열 줄도 되지 않는 짧은 글이었지만, 내겐 첫 문장의 탄생이었다. 그 한 문장이 내 안의 굳게 닫혔던 문을 아주 조금 열어준 느낌이었다. 글이 누군가를 감동시키지 않아도 괜찮았다. 일기를 쓰듯, 친구에게 말하듯, 지금의 감정과 생각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글을 쓰기 시작하자 매일의 감정이 조금씩 정돈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써볼까 생각하게 되었고, 자투리 시간마다 떠오르는 생각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었다.


회사에서 지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밤, 글 한 편을 쓰는 일은 마치 따뜻한 물로 씻어내는 듯한 정화의 시간이 되었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내 안의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잠시 멈추는 듯했다.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복잡했던 머릿속이 비워지는 느낌.


물론, 글이 항상 잘 써지는 건 아니었다. 몇 날 며칠을 노트북 앞에 앉아 있어도 한 줄 못 쓰는 날이 있었고, 내가 쓴 글을 다시 읽고는 한숨을 내쉬며 통째로 지운 날도 많았다. '내가 뭔데 이런 글을 쓰고 있나' 싶은 자기 비하도 끊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다시 예전의 무기력함과 자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역시 난 안 돼.'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애써 다독이며 다시 노트북을 폈다.


마치 술을 끊은 초반처럼,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서야 했다. 글쓰기 또한 그렇게 반복과 실패 속에서 조금씩 나를 일으켜 세워줬다.


하루는 우연히 온라인 커뮤니티에 조심스럽게 내 글을 올려보았다. 부끄럽고 두려웠지만, 누군가 한 줄이라도 읽어준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내 취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 같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 비난받지는 않을까?', '내 글이 너무 형편없으면 어쩌지?' 온갖 걱정이 밀려왔다. 며칠 뒤, 한 댓글이 달렸다.

“저도 비슷한 상황에 있었어요. 덕분에 용기를 얻었어요.”


그 댓글을 보고 한참을 울었다.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 이야기, 내 감정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는 것.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내 고통이, 내 치유의 과정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


그 순간, 글쓰기는 단순한 자기 위로를 넘어, 타인과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 댓글 하나가 나에게 계속 쓰고 싶다는 마음을 주었다.


이후 나는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꼭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짧아도 좋았다. 때론 그날의 기분을 한 문장으로 적기도 했고, 과거의 기억을 꺼내어 긴 글로 펼쳐보이기도 했다. 술에 취했던 나날, 가족에게 상처 줬던 말들, 다시 용서를 구한 이야기, 아버지와의 갈등, 직장에서의 불안감…


모든 감정을 글로 토해내듯 써내려갔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 안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직면했다. 외면하고 싶었던 기억들이 글이라는 형태로 눈앞에 펼쳐질 때면,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홀가분했다. 마치 오랜 시간 곪았던 상처를 터뜨려 소독하는 과정 같았다.


가장 아픈 글은 ‘과거의 나에게 쓰는 편지’였다.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 다그치기보다, “그땐 너도 많이 외로웠지”라고 말하며 나를 감쌌다. 글을 쓰며 울었고, 다시 다독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과거의 나를 비난하기보다, 그 시절의 아픔과 외로움을 인정하고 보듬어주는 법을 배웠다. 글을 통해 나는 나 자신과 화해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문장이 튀어나왔다.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 쓰고 있다.”


그 문장은 나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글쓰기는 단순한 배출이 아닌, 치유의 행위가 되었다. 글을 통해 나는 내 감정을 객관화하고, 상황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글쓰기는 나에게 심리 치료사의 역할까지 해주었다. 독서와 글쓰기는 점차 나의 일상이 되었고, ‘매일 30분 쓰기’라는 작은 습관이 쌓여 어느새 내 삶의 균형추가 되어 있었다.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힘이 생겼다.


지금도 가끔은 노트북 화면 앞에 앉아 멍하니 커서를 바라볼 때가 있다. '무엇을 써야 하지?' '이런 글을 누가 읽어줄까?' 여전히 막막할 때도 많다. 글쓰기가 여전히 쉽지만은 않다. 때로는 예전의 불안감과 자기 의심이 다시 고개를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막막함조차 써 내려가면 글이 된다는 걸. 이 감정들조차 나의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이가 갑자기 달리기를 할 수 없듯, 나 역시 술을 끊고, 감정을 마주하고, 글을 써나가는 시간은 천천히 자라야 하는 시간이었다. 배를 밀고 일어서다 벽을 짚고, 몇 번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아이처럼, 나는 그렇게 글쓰기 앞에 서 있었다. 위기와 고통이 없었다면 시작하지 못했을 테고, 시작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텅 빈 노트북만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작했다. 몇 줄 끄적인 날과, 실패한 날, 자랑하고 싶은 날이 뒤섞여 있더라도, 나는 매일 한 줄씩 나아가고 있다. 글쓰기는 더 이상 부담이 아니라, 나를 지탱하고 성장시키는 힘이 되었다. 매일매일 쌓여가는 글들이 나에게는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내 삶을 채워가는 과정이 되었다. 그렇게, 글쓰기로 나는 다시 살아가는 중이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도 쓸 수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선, 뭐라도 쓰세요. 텅 빈 노트북은,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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