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작년에 고성에 다녀온 후 둘 다 프리랜서인 우리 부부는 반반육아를 하기로 결정했었다.
매일 일과 육아의 줄타기를 하느니 각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서로에게 주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성에서 돌아온 11월 이후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반반육아는 일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긴 내가 주로 육아를 했고 남편은 일하느라 주말 하루 편히 쉬지 못했으며 비슷한 이유로 서로 지쳐갔다.
그때 지자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한달살기에 선정됐다.정말 나이스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한옥고택의 방이 두 개라 추가 인원에 대한 금액을 지불하기로 하고 여행메이트를 찾았다. 거의 하루 만에 한 달 일정의여행메이트들이 정해졌다.
중간에 아이와 남편도 내려올 예정이다.
밀양 오는 첫날 지인과 함께 내려왔다.
여행메이트들은 모두 담담글방과 계약한 지인들이거나 작가후배였다. 최소 3박 4일에서 길면 7박 8일씩 머무르는 일정이 계획돼 있다.
혼자 하는 여행을 선호하지만 이번에는 워케이션이니작가들과 함께 글도 많이 써야지!라는 결심이었다.
원래 해보기 전에는 포부만 큰 법이다.
첫 여행메이트 Y님과는 숙소 근처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가까운맛집에서 밥을 먹고 동네 산책을 주로 했다. 숙소에서 차로 5분 거리인 위양지를 간신히 갈 정도로 밥과 커피, 책과 수다로 채워진 하루는 은근히 바빴다.
그러다 보니 글쓰기라고는SNS에 올리는 토막글이 전부였다. 지자체 지원을 받아 지역을 홍보하는 목적의 여행이라 하루 2건씩 매일 글과 사진을 올려야 하는데 그 과제조차 부랴부랴 할 정도였다.
각자 매일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챙겨 다녔지만 작업을 못하는 날들이 많았다.
대신 순간순간은 다른 경험들로 채워졌다.
함께 아궁이에 불을 때며 연기를 잔뜩 마시고 서로 조선시대였으면 소박맞았을 거라고 깔깔거리다 들어와 차 한잔을 마주 놓고 새벽이 될 때까지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소환되기도 하고 가족 얘기, 예전에 했던 일 얘기, 서로의 친구 얘기 등등 이야깃거리는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한옥카페에서 김광석이나 카펜터즈의 노래를 들으며 가만히 떨어지는 빗방울을 볼 때면 너무 좋다,를 연발하기도 했다.
밀양 한옥 카페 <퇴로정>
경험하는 모든 것을 좋아하고 기뻐하니 초대한 입장에서 더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평소에도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었지만 밀양에서는 너무 신나서 날개 달고 날아갈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작은 꽃 한 송이, 길 가다 만난 고양이에도 벅찬 기쁨을 드러내는모습에 매 순간이 긍정의 기운으로 채워진다.
누군가는 아이 학교 어머니와 이런 사적인 여행을 단 둘이 떠났다면 놀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다니는 발도르프 학교는 학년에 한 반씩 있고쭉 12학년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친하면서도 어려운 존재가 학부모들이다. 우리 학년은 특히 엄마들끼리 친하지만 서로 존대하고 조심하고 배려와 예의의 선을 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서로의 여행 스타일도 모른 채, 7박 8일의 일정을 함께했다. 그분은 결혼 13년 만에 가족 여행이 아닌 여행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엄마들의 여행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아직 아이가 어려서, 아이를 두고 떠나는 여행은 상상할 수 없어서, 남편이 바빠서,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하루하루 너무 버겁고 힘들어서 등등.
때 되면 하는 가족여행 말고 혼자 가는 여행은 상상도 못 하는 엄마들이 많았다.
나 역시 아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는 따로 나와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할 여유도 없이 지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Y님은 다음에는혼자 하는 여행도 꼭 해보고 싶다고 했다.
소소하지만 평소와 다른 하루하루를 보낸 Y님
숙소 사장님께서 정원의 나무 한 그루와 여러 모종과 꽃대(?)를 Y님께 주셨다. 마당 있는 집 3년 만에 '식알못'에서 '식집사'로 거듭난 Y님은 이런저런 식물과 나무들로 자연스러운 한국식 정원을 가꾸고 계신 사장님과 말이 잘 통했다.
"와! 이 나무 너무 예뻐요!"
"그럼 가져가실래요?"
삽을 들고 오신 사장님이 나무 한 그루를 뿌리채 삽으로 퍼내 비닐에 싸주셨다. 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뽑아주실 줄이야!(어차피 정리하고 싶어 하신 나무였고 Y님은 그 나무를 언젠가 정원에 심으려고 생각 중이었으니 이 또한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대화를 듣고도 꽃 이름, 나무 이름을 거의 잊었지만 사장님께서는한 그루 나무 외에도 여러 꽃과 풀들을 잔뜩 담아주셨다. (어쩌면 이렇게 무슨 꽃인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지ㅠ)
한지공예를 체험했던마을 현카페에서 작약 2주(?) 정도를 산 Y님은 카페 사장님께도 쪽파 모종이며 이런저런 식물들을 받았다.
Y님 먼저 집으로가는 길, 차 뒷자리에 나무와 꽃이 가득하다. 이제 자라던 곳을 떠나 조금 시들고 풀이 죽었을 나무와 꽃들은 그분의 정원한쪽에 밀양존으로 자리 잡아 두고두고 계절마다 다른 꽃을 피우며 이곳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밀양 분들의 넉넉한 인심과 따듯한 나눔의 기억 역시.
밀양에 뭐 볼 게 있다고?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 나 역시 떠나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아직 고작 10일 차.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바다를 좋아하는 나는 내륙 여행의 기억도 거의 없고 밀양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 내려와 소소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밀양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
퇴로마을 소은고택
문화재로 지정된 200년 된 한옥고택은 상업화된 다른 숙소와 달리 세월의 흔적과 가문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어디 가고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게 부작용일 정도로 마을도 숙소도 사람들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