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오늘도 반나절 넘게 빙 둘러싸인 연수생들 사이에서 강사님이 먼저 시범을 보여주고 제자리로 돌아가 본 그대로 따라 그리는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마지막 제출해야 할 과제로 자유롭게라니 참으로 스트레스가 절로 풀리는 그림 과제다. 그도 그럴 것이 강사님의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는 쉽게 잘 따라 할 것 같다가도 돌아서서 제자리로 돌아와 그리려고만 하면 그만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 문제였다. 이렇게 헤매는 그림을 그리고 나서 결과를 보면 그림은 여지없이 엉망이었고 행여 누가 볼세라 부끄럽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생각대로 자유롭게 그리라는 말씀에 한 줄기 희망이 생겼고 선뜻 집어 든 붓으로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비치는 그림 과제부터 살펴보니 얼핏 보기에 호랑이의 거꾸로 모습이다.
2가지 이상 5가지의 색 가운데 자유롭게 사용하라는 조건하에 나름대로 계획을 세운 것이 물의 양을 조절해서 농담 표현만 제대로 하면 될 것이라 여겼다. 당연히 잘 그려지겠거니 기대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즐겁게 완성이 다 되어 갈 즈음 드러난 그림은 또 실망이다.
그림 과제와 비슷한 호랑이는 아니어라도 나만의 개성 있는 호랑이이기를 바랐으나 돼지 코에 길쭉한 눈이며 알 수 없는 수염의 모습이 그 어느 동물과도 전혀 닮지 않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괴이한 동물임에 틀림없었다.
아무리 기본기가 없고 실력이 없는 처음으로 접하는 그림이라 하나 이번 연수에 참여해서 벌써 7일째인데 이젠 흉내라도 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림은 끼만 있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모 강사님의 말씀에 연수 내내 힘을 얻었고 희망을 가졌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그 끼마저도 없는 것은 아닐까?
가장 중요하다는 끼조차 없는 내가 무엇보다 그림 그리기에 그토록 목말라했던 이유는 교실 앞에서 창문 밖 정면으로 보이는 자연의 변화였다. 다른 교실과 달리 우리 교실은 3면이 창이어서 뒷면으로 보이는 자연의 경관은 그 어떤 그림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4계절 변화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봄에는 화려한 꽃들의 향연이, 여름에는 무성한 푸르름이, 가을에는 불타는 단풍의 축제가,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의 무상함을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으리라.
우리 아이들 솜씨와 자연의 솜씨가 함께 어우러진 절묘한 기회가 나에게 2번씩이나 주어졌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2년 동안 감사해 했다. 역시 자연 경관은 그 어떤 그림 솜씨로도 흉내 낼 수 없는 기묘한 작품이다. 보는 위치와 계절에 따라 자연의 모습이 그렇게 달라지리라고는 전혀 짐작 못한 일이다. 4층에서 내려다볼 때는 숲의 윗 자락과 어우러진 아파트의 모습이 한 폭의 동양화로 여백의 미가 있었다면 2층에서는 풍성한 숲속 사이로 살포시 드러나 보이는 아파트의 모습은 색감 풍성한 수채화에 속했다.
일찍이 수채화를 배우지 못한 게 한으로 남던 요즘 연수를 통해 정물 데생과 누드 크로키, 색칠하기 등에 두터운 벽을 느끼다가도 생전 처음 접하는 신선한 충격과 여러 가지 소중한 경험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하고 새로운 목표를 정함과 동시에 희망을 가져본다.
여전히 그림에 관심이 없었다면 죽을 때까지 데생과 말로만 들었던 누드모델 크로키를 언제 해 볼 것이며 이제는 기억 저 편 흐려진 물감 색칠하기를 언제 직접 해 볼 것인가.
한참 젊은 시절에는 타고난 약체로 직장생활에 애들 키우며 살림하느라 옆을 바라볼 겨를도 없이 힘들고 바쁘게 살았었다. 그러나 그 정신없는 가운데에도 나를 정화시키고 지탱해 줄 버팀목이 있었으니 시간이 나는 대로 무작정 써 내려간 글이었다. 글을 쓰는 동안 행복했으며 그 행복한 세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느낌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젠 그림으로도 그 행복감을 느끼고 싶어 50줄이 다 된 이 나이에도 망설이지 않고 수채화 기초연수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다. 남은 내 인생에 또 하나의 새로운 목표가 설정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미술시간이면 애들 앞에 늘 죄인이었었는데 이제는 애들에게 어떤 역할이 되어 주어야 하는지 그림을 시작하면서 얻게 된 가장 큰 수확 중의 하나다. 늦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르다는 사실을 나는 믿고 있다.
순간순간 가슴 가득 채워지는 감동들을 그림으로 표현하고픈 욕구들을 더 이상 미루어 둘 수만은 없기에 더 늦기 전에 부지런히 배워서 수채화의 무릉도원에 푹 빠지고 싶다. 글과 함께라면 행복이 배가 되지 않을까?
나이 먹어 늦게 시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젊은 사람들에 비해서 빨리 포기하는 이유가 급한 마음 때문이란다. 늦게 시작한 만큼 마음이 급해져서 서두르게 되고 마음먹은 대로 안 되다 보니 결국 포기하고 마는 일이 생긴다고 한다.
결코 서두르거나 욕심내는 일 없이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간다는 생각으로 기초부터 탄탄하게 쌓을 계획이다. 다행히 뜻을 함께 한 동료들이 있어 일주일에 하루 3시간씩 연수를 받고 있는 이 미술관에서 실력 있는 화가님의 사사를 받기로 했으니 글과 함께 그림의 무릉도원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내일을 꿈꾸며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배우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