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우리 동 앞 정원에 때아닌 코스모스가 의연하게 피어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하긴 코스모스가 제철을 모르고 서둘러 피는 기현상이 어찌 어제 오늘만의 일이던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인데……
이상하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별 감흥이 없던 코스모스에 대한 정이 각별해지고 못내 그리워서 피어있는 것만 보아도 공연히 가슴 설레고 알 수 없는 향수가 느껴져서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문득 학창 시절 고향 땅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코스모스가 그대로 되살아난다. 애써 코스모스를 찾아 나서지 않아도 고개만 돌리면 길가에 잔뜩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풍성하게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습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일렁인다.
결혼해서 남으로 북으로 우리나라 땅을 오르내리며 사는 동안 고향의 코스모스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깨닫기 시작했고 몹시 그리웠다. 고향에서 마음껏 볼 수 있었던 코스모스를 다른 어디에서도 똑같이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급기야는 코스모스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생면부지인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이 코스모스에 대한 그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았던 모양이다. 어쩌면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스라이 멀어진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 말이다.
며칠을 꿈속에서 코스모스를 찾아 마구 헤매고 다녔다. 길 양옆으로 흐드러져 피어있는 코스모스 길을 따라 친구들과 손을 잡고 뛰어다니던 케케묵은 먼지가 두껍게 쌓인 기억이 그제서야 살포시 고개를 든 것이다. 그리고 여고시절 학교 옆 철길 따라 끝없이 피어있던 코스모스 사이로 유난히 드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친구들과 재잘대던 모습이 그대로 꿈속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된 몸살을 앓고 일어나 가족들과 함께 일요일 오후 코스모스를 찾아 나섰다. 빨강, 분홍, 하양 등 무리 지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코스모스 밭을 찾아 다신 그리워하며 끙끙 앓는 일이 없도록 실컷 보고 실컷 카메라에 담았다.
이후 어디에서건 코스모스를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코스모스가 눈에라도 띌 양이면 잠시 차를 멈추고 서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꽃잎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지긋이 향수를 맡고서야 차에 올라타곤 했다.
참으로 이상도 하지. 학창시절 흔하디흔한 코스모스는 결코 예쁜 꽃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코스모스만큼 편안하고 예쁜 꽃이 없다. 물론 지천에는 이름 모를 예쁜 꽃들이 얼마나 많은지……
1학년 입학 후 식목일을 맞이해서 부모님과 함께 작은 화분에 씨를 뿌리거나 화초들을 심어오도록 과제를 냈었다. 오랜만에 한가한 틈을 내 창가의 화분들을 살피다가 가녀린 꽃대 끝에 아슬하게 피어 바람이라도 불면 금세 꺾이고 말 것 같은 분홍꽃을 보고 문득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슨 꽃인가 싶어 푯말을 보니 <사랑초>라고 씌어 있다. 아무래도 이것은 수시로 보살피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은 생각에 조심스레 내 책상 위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 아이들에게 작은 화분을 들어 보이며
“얘들아, 이 꽃이 무엇인 줄 아니?”하고 묻는데 가져온 아이도 모르는 듯 대답하는 아이가 아무도 없다.
“이 꽃은 <사랑초>라는 꽃이야. 이 꽃이 아직은 너무 약해 우리 모두 수시로 보살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선생님 책상 위에 얹어 놓았거든. 이 꽃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우리 다 함께 사랑해주자.”하고 말한 뒤 주의점을 이야기해 주었다.
며칠 뒤 철이 어머니께서 직장이 쉬는 날이라며 애를 데리러 왔다가 잠시 교실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아 참, 선생님 <사랑초>가 어떤 꽃이에요?”하고 묻는다. 그래서 책상 위에 놓인 꽃을 가리키자
“이게 <사랑초>예요? 아니 우리 철이가 며칠 전에 대뜸 <사랑초>를 사달라는 거예요. 너무나 예쁘다고. 그래서 나는 도대체 무슨 꽃이기에 얘가 이러나 했더니 아유, 작은 풀꽃이네요.”하신다.
늘 작은 장난감을 쥐고 와서 수업시간에 손장난만 치고 있고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던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늦되다며 걱정하던 어머니였다. 남학생 중에서는 생일이 가장 늦고 키가 작았으며 유아티를 미처 못 벗고 입학한 모습이 내내 안쓰러워 보이던 아이가 <사랑초>에 대한 설명은 어떻게 듣고 예쁘다고 느꼈는지 신기하지 않을 수 없고 고맙기까지 했다.
직원연수로 들렀던 평창 오대산 입구의 『자생식물원』에 다녀온 이후로 사랑초와 같은 풀꽃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서인지 올여름에는 키 작은 풀꽃들이 유난히 내 눈에 많이 띄었으나 부끄럽게도 여전히 꽃 이름을 모르는 게 태반이다. 아울러 모양새가 앙증맞고 깜찍한 게 마냥 신기하긴 해도 아직은 코스모스처럼 정감이 가거나 특별한 느낌은 없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하나씩 익히다 보면 감흥도 생기고 정분도 두터워지리라.
아무래도 올가을은 코스모스가 만발해 흐드러질 무렵 부러 시간을 내어서라도 가족과 함께 살았던 곳을 둘러보며 가을여행을 해야 할 모양이다. 꿈속에서조차 코스모스를 찾아다녔던 그 이듬해 우리가 살았던 이동에서 포천읍으로 나가는 도로 양옆으로 코스모스를 빽빽이 심어놓은 덕분에 행복한 가을을 보냈었다. 지금쯤 서둘러 피었을 코스모스가 바람에 한들거릴 모습이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