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남단에서 경기도 북부까지 넘나들며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객지에서 생활해 온 지 그새 15년이 훌쩍 넘었다. 생면부지인 낯선 곳을 찾아다니며 살아오는 동안 때로 힘들고 외롭고 어려울 때마다 큰 힘이 되어준 건 바로 내 어머니의 기도였고 이러한 내 어머니의 기도는 지금껏 나를 버티게 해 준 신앙이기도 했다.
유난히도 병치레를 많이 하고 자라온 어린 시절. 엉덩이에 주사를 맞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아파해하며 힘없이 주저앉아서 보챘고, 그래서 엄마 손을 잡고 걷기보다 엄마 등에 업혀서 다녔던 기억이 더 많다. 아울러 내 밑 동생은 업혀 있는 언니인 나를 보며 떼를 쓰던 모습도 생생하다.
유아 시절, 급체로 자칫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는 나를 위해 어머니의 기도는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을 테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물로 기도하시는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은 웬만큼 철이 든 학창시절이었지 싶다.
학창시절 내내 식은땀을 흘리며 한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깨는 일이 많았고 그 때마다 어머니는 항상 내 머리맡에 앉아서 기도하고 계셨다는 사실은 훗날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까지 흔들리지 않는 내 신앙이 되리라고 짐작이나 했겠는가.
자식 낳아 키워 보고서야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으니 나로 인해 오랜 세월 많은 밤을 설치며 애를 태우셨을 그 심정이 오죽하셨을까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그러나 나는 결혼 후에도 내 어머니에게 끊임없는 애물이었다.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어머니께서 아이들을 맡아 키워주셨는데 내 체질을 닮아서인지 역시 잔병치레를 많이 했음에도 어머니께서는 좀처럼 아이들 문제로 괜한 걱정 한다시며 전화를 주시지 않았었다.
그런데 둘째가 생후 8개월째이던 어느 날 친정에 가까이 살면서 많은 도움을 주던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내일 토요일인데 올 수 있어?"
대뜸 묻는 소리가 이상하게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다급해진 목소리로 단숨에
"왜? 무슨 일 있니? 애들이 아파?"하고 물었지만 내일이 토요일이라서 언니가 올 수 있을까 해 본 전화라며 별일이 없으니 걱정 말라는 말만 남기고 동생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내심 불안한 생각을 쉬이 떨쳐버릴 수가 없었고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면서 교실에 올라가자마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책상에 엎디어 흐느끼며 울고 있는데 대학 동기가 언제 뒤따라 왔는지 전화를 받던 내 모습이 걱정이 되어서 따라 왔노라며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 말라고 등을 다독여주어서야 마음을 조금 안정시킬 수가 있었다.
퇴근 후 늦은 시각에 저녁을 먹고 있는데 주인집에서 전화가 왔다고 다급하게 부르신다. 그 순간 몸이 움츠러들면서 마냥 불안해지는 심정이 오후에 교실에서 느꼈던 바로 그 기분이었다. 조심스레 수화기를 건네받는데 오후에 전화를 준 여동생의 목소리가 떨리며 울먹이고 있는 게 아닌가.
"언니, 빨리 와야겠어. 들이가 오늘밤을 못 넘길 것 같대."
기가 막혔다. 난데없이 둘째가 오늘밤을 못 넘긴다는 소리에 주인 내외분이 곁에 계심도 잊고 나는 그만 소리 내어
"이들아!"라며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고 내 방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게 주인아주머니의 부추김을 받으며 건너왔다. 주인아주머니께서는 망연자실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셨는지 당신의 눈물을 닦으시며 빨리 가보라신다.
마저 통화를 끝내고 온 그이가 차편을 알아보기 시작했지만 서울까지 가는 고속버스는 이미 끊어진 시각이라 서둘러 여주에서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기차표를 사려는데 밤 깊은 시각임에도 입석밖에는 없다지 않은가. 별 도리가 없었다. 걸터앉다 서다 장시간에 걸쳐 기차를 타고 전주역에 내리니 새벽 4시가 넘었다.
곧바로 둘째가 입원해 있는 전북대 병원 응급실로 가자 어머니는 침대에 누워 있는 들이를 꼬옥 껴안고 계셨고 아버지는 동생들과 함께 가슴을 조이며 복도에서 기인 밤을 꼬박 지새우고 계셨다. 둘째는 의식을 잃은 상태라며 코에 작은 고무관을 꽂아 유리병에 이미 반쯤 뽑혀져 있는 새까만 피를 계속 뽑아내고 있었다.
의사에게 상태를 묻자 매우 위험한 상태이니 상황을 두고 보아야 한다며 병명은 「라이증후군」으로 확실한 병명과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란다. 다만 이 병에 걸리게 되면 30%만이 살아남는데 그 30%중에서도 정상아로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은 15%라니 작은 내 아들은 사경을 헤매고 있음이 분명했다.
근 나흘을 무의식 상태에서 온 가족들을 몹시 애태우게 했고 의사들도 번번이 가능성이 없다던 둘째는 결국 사경에서 깨어나기 시작해 우리 모두를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모른다. 정말 감사했다.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할 때쯤엔 원장님이 올라오셔서 둘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아유, 하나님이 아들을 살리셨어요. 잘 키워요."
어린 나이 깊은 밤에 아파해하며 홀로 눈 떠서 무서워할 새도 없이 어머니는 늘 같은 자리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나와 함께 하셨고, 살아오는 동안 내내 나와 우리 가족 모두를 지켜주셨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 못내 어머니가 그리워서야 깨달았다.
이 나이에도 내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힘을 얻듯, 훗날 내 아이들이 제 어미인 나를 그리워하며 힘을 얻을만한 아무런 추억도 남겨주지 못하고 내 어머니 마냥 정성도 다하지 못했으니 제 어미를 그리워할 때쯤엔 어미의 무엇에서 힘을 얻고 살아갈까 생각하면 자못 부끄럽고 미안하다.
허니 더 늦기 전에 정성을 다해야 하리라. 내 어머니와 아이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울러 내 어머니처럼 겸허한 자세로 구하리라. 내 안의 모든 소망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