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단상

by 이옥임

기인 여름 내내 열어두고 살았던 창문을 모두 닫아야 할 만큼 어느새 바람이 차가워졌다. 알게 모르게 서서히 다가온 가을이 아니라 어느 날 문득 예기치 않게 찾아온 낯익은 손님과 같은 쌀쌀함이 이미 가을이 깊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찬바람이 일면 이상하게 가슴이 뻥 뚫려 메울 길 없는 쓸쓸함이 가득하고 공연히 외로워져서 서럽지 않은 게 없고 아프지 않은 게 없다. 물론 학창시절 떨어져 나뒹구는 낙엽을 보고도 눈물이 나고 분홍 빨강 하양 코스모스가 어우러져 한들거리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못내 시렸었다.


그러나 불혹을 넘겨 중턱에 잠시 올라 내려가는 지금은 사느라 바쁜 탓도 있고 퇴근 후에는 운동에 빠져 사느라 언제 차분하게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며 감상할 시간이 없어진 탓인지 감정이 무디어졌다. 하긴 탓이 아니라 다행인지도 모른다. 학창시절 감성이 그대로 이어졌다면 이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살아냈을까?


수필로 등단했을 당시 심사평을 맡으신 선생님께서 용케도 내 성격을 아시고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살아왔을지 모를 여린 심성"이라는 말씀에 이 세상 누군가가 나를 정확히 알아준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눈물부터 쏟아냈었다. 친정 부모님 그리고 그이 외에 글만으로도 내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를 알아차린 것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마치 우리 아버지 같은 말씀이어서 그 말씀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는데 뽑아주시기까지 했으니 내가 살아갈 이유를 마련해 준 셈이다.


나를 가장 정확히 알고 계셨던 내 아버지는 이젠 추억 속의 인물로 그리움으로만 남아있다. 꼼짝 못 하고 몸져 누워만 계셨어도 살아 계신다는 사실로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내 가슴 속의 아버지로만 남아있게 된 것이다.


'내 가족 중 누구 하나라도 어느 날 문득 사라지게 된다면 어떻게 살아갈까?'가 어린 시절의 고민이었다. 만에 하나 가족을 잃게 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았고 나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을 줄로만 알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못내 가슴이 아팠던 교통사고에 의한 남동생의 요절과 작년 말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나서 세상 사는 일에 많이 익숙해졌다. 소중한 가족들이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는데도 여전히 계절은 바뀌고 지천에는 어여쁜 꽃들이 만발해 있으니 그저 나만의 아픔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셈이다. 못 견딜 것 같았던 아픔과 상처도 시간이 지날수록 치유가 되고 새살이 돋는다는 것도.


요즘에는 내 딸이 가끔 이런 고민을 한단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어느 날 문득 가족 중에 누군가 하나라도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나도 내 딸처럼 우리 가족들은 영원히 함께 살 것으로만 여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동생이 앞서가고 난 후에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절로 알게 된다는 것을 어린 시절엔 전혀 짐작 못한 일이다. 정말 가족이 떠남과 동시에 세상이 끝나는 줄로만 알았었으니까. 그래서 어린 심정에 가끔 잠도 못 이루고 걱정하기도 했었다. 아버지와 동생이 가고 없는데도 나는 아무 일 없듯이 이렇게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을.....


작년이었다. 토요일이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퇴근하고 있는데 아파트 주차장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땅바닥에 누워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아서 황급하게 주차를 하고 달려갔었다. 가까이서 보니 지팡이를 짚고 금세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아슬하게 아파트 내를 늘 산책하던 아주머니다.


멀리서 뵈던 모습과는 달리 훨씬 젊어 보이는 분이 부자유스러운 몸으로 그만 보도블록 턱에 걸려 쓰러지면서 머리를 찧었는지 피가 흘러 주변에 흥건히 고였다. 이 소식을 가족들에게 알려주고 아주머니를 모셔 가는 것을 보고서야 집에 들어와서도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은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시는 동안 건강해야 한다시며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후 지팡이를 짚고도 오전 오후 1번씩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바람에 이마와 콧잔등에 상처가 나서 들어오시는 날도 허다했고 공원에서 앉아 계시다 그대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데도 주변 사람들은 누워서 주무시는 걸로만 알더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살다 보니 전혀 예측할 수 없던 일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았다.


아주머니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본 순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고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와 가족들은 연신 고맙다 시며 머릴 숙여 인사를 했지만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을.


이후로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내내 궁금했었는데 며칠 전에 아저씨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아주머니 부부의 뒷모습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었다. 혼자였던 아주머니 대신 지팡이를 짚은 아저씨의 팔을 붙잡고 두 분이 아슬하게 아파트 내를 산책하는 모습이 마치 내 노후를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저려 왔기 때문이다.


누가 그 모습이 안 될 거라 호언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 아버지 역시 그리될 줄 아무도 짐작 못한 일이었다.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다가선 아버지를 보면서 미래의 내 모습이 보였고 때문인지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또 소중했었다.


퇴근하고 서둘러 테니스장을 향하고 있는데 누렇게 퇴색된 나뭇잎 하나가 내 발 앞에서 힘없이 톡 떨어진다. 아직도 무성하게 남아있는 많은 나뭇잎들 가운데 왜 하필 이 나뭇잎이 떨어졌을까 안쓰러운 마음에 허릴 굽혀 살며시 주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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