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내 분리수거일이다. 가지고 나가야 할 것들이 많아서 서둘러 등교하는 아들 손에 우선 빈병과 플라스틱 우유곽 등이 들어있는 봉투를 건네주었다. 어제 미리 분리해 놓은 봉투였다.
그리고 나가거든 의류를 내놓아도 되는 날이면 손을 들어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올려다 보고만 그냥 가라는 약속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연히 힘들여 들고 나갔다가 가뜩이나 쫓기는 출근시간에 의류를 받지 않는 날이라면 되돌아서 가지고 올라올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없지 않은가.
어제 아들 녀석의 방을 치우면서 턱없이 작아서 못 입게 된 옷들을 누구라도 입을 수 있도록 봉투에 넣어 차곡차곡 쌓아 놓았으니 하루라도 빨리 내어 놓아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분리수거일이지만 종류별로 내놓는 날짜가 달라서 모르고 애써 가지고 나갔다가는 여지없이 낭패를 보기 일쑤다.
아들이 나가자 나는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 보았다. 아침 기운이 여간 차가운 게 아니다.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현관을 막 빠져나가는 아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이내 분리수거 통에 꼼꼼히 분리를 하는가 싶더니 경비 아저씨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곤 아저씨가 손짓으로 가르치자 아들이 나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인다. 의류를 내놓아도 된다는 뜻이다. 멀리서 보아도 아저씨가 가르친 봉투가 의류 봉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분리를 끝낸 비닐봉지를 들어 보이며 아저씨에게 말을 건네자 손을 내젓는 아저씨의 모습에 아들은 봉지를 든 채 등교를 서두르고 있다. 봉지를 버릴 데가 없느냐고 여쭈었던 모양인데 아저씨가 되가져가야 한다고 하자 그만 손에 들고 가는 모습이 안쓰러워 들리지도 않을 14층에서 나는
"아들, 엄마가 가지고 갈 테니 놔두고 가!"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한번 휙 돌아보곤 이내 가버린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의류 봉지를 두 손에 들고나갔다. 그런데 가보니 분리수거를 하고 난 봉투를 따로 버릴 수 있는 종량제 봉투가 옆에 마련이 되어 있었고 나오는 이들마다 다들 분리하고 남은 봉지를 그곳에 쑤셔놓고 의연하게들 사라진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경비 아저씨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집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분명히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멘 채 분리수거를 했으니
"얘야, 봉지는 여기에 버리고 가거라."해주셨더라면 얼마나 감사했을까. 그런데 다시 집에 들어가는 아낙들도 빈 봉지를 버리고 가는데 등교하는 학생이 봉지는 버릴 데 없느냐고 여쭙는데도 몇 장이나 된다고 손을 내저어 내칠까? 안타까웠다.
등굣길에 늦는다거나 귀찮다며 언짢아 하지 않고 순응하며 가지고 나가 분리하는 아들의 모습을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고 있노라니 아들에 대한 감동이 내 가슴을 울렁이게 했고 자랑스러워 가슴이 벅찼는데 그만 빈 봉지를 허허롭게 들고 가는 아들의 모습에 가슴이 턱 막혔다.
사실 각 라인에서 나온 회비로 경비실에 종량제 봉투를 매달 사 드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바로 이럴 때 아니 출근이나 등교하는 학생들이 빈 봉지를 처리 못해 난감해할 때 요긴하게 쓰도록 배려해 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옆에 비치를 해 놓고도 아무 말 없이 쑤셔 넣고 가는 어른들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고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학생에게는 모질게 내젓는 심사는 무엇이었을까?
이 글을 쓰면서도 사실 마음이 편치 않다. 내 아버지의 연세는 아니어라도 얼마든지 아이들을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연세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분을 감히 내가 원망하고 있으니 될 말인가. 그저 조금만 배려해주셨더라면 참으로 감사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일 뿐이다.
선배인 K 장학사의 동화책에서 「떠나버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읽고 나름대로 아파트 주민을 위해서 신념을 가지고 일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었다. 경비 할아버지로 인해 아파트 주민들은 행복해했고 누구보다 아이들이 이 경비 할아버지를 가장 좋아했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부러웠던 것은 좋은 할아버지와 가까이서 지낼 수 있는 아파트 주민들은 얼마나 좋을까였다. 맞벌이로 인해 오후 내내 외톨이가 되어야 하는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할아버지를 아이들은 무척 따랐고 경비 할아버지로 인해 마음 편히 일을 끝내고 돌아올 수 있는 엄마들 또한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감사해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게 되자 아이들이 힘들어 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는 할아버지의 뒤늦은 편지 속에 꽃밭에 심어놓은 꽃들을 돌보는 방법을 세심하게 적어둔 내용을 보고 할아버지가 아파트 주민들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새삼 깨닫는 내용이다.
쉽게 읽힐 수 있는 동화이나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는 동화라고 볼 수 있다. 오늘은 문득 그 동화 속의 경비 할아버지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