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혜

by 이옥임

아침에 일어나 밥솥 뚜껑을 여니 밤새 밥알이 매우 알맞게 잘 삭아서 동동동 떠올랐다. 아들이 깨기 전에 얼른 만들어서 먹여야겠다는 생각으로 그이가 운동을 나가고 난 뒤 서둘러 끓여두고 나니 부자가 이런 심정일까? 내 아들이 일어나서 깜짝 반기며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하니 절로 즐거워진다.


"엄마, 식혜 언제 만들어 줄 거야? 못 만드니까 사준다고 해놓고선 계속 잊어버리고 이제껏 사주지도 않았잖아! 언제 만들어줄 건데?"


방학도 했으니 이번에는 다짐이라도 받아두겠다는 듯 장난스레 재차 확인을 하는 녀석의 물음에 당장 만들어 주겠다고 한 것이 바로 어제였다. 나 역시 출근을 해야 하는 때라면 자신 없는 태도로 막연하게

"그래, 엄마가 만들어 줄게"라는 말로 녀석이 채근하는 순간을 모면하려 했겠지만 방학을 했으니 더 이상 미루거나 녀석을 애태울 이유가 전혀 없어졌다. 방학하면 해주겠노라고 했던 것이 그만 무심케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니 어젯밤 내친 김에 사다두었던 엿기름을 꺼내 불린 물을 거르고 밥을 넣어 밥통에 앉혀 두었었다.


사실 그 엿기름도 방학 직전에 녀석이 식혜를 만들어 달라며 한바탕 조르는 바람에 방학하거든 틀림없이 만들어 줄 테니 며칠만 참자며 다독일 양으로 함께 가서 사왔던 것이다. 어미가 되어서 자식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식혜 하나도 선뜻 만들어주지 못하고 살아왔으니 행여 남들이 알면

"아니 그렇게 쉬운 것을 왜 안 만들어주고 애를 태우게 해?"할 테지만 솔직히 어렵고 번거롭다는 생각에 지레 겁부터 내온 터였다. 어찌 식혜뿐인가. 먹는 것도 큰 낙이라는데 가족들에게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살아 왔으니 입이 열 개라도 나로선 할 말이 없다.


그이의 반찬 까다로운 건 주변에서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이의 입맛도 하류의 옥돌마냥 원만해져서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한 번씩 긴장의 도가니 속에 빠지게 할 때가 있으니 그 때가 바로 그이 몸이 편치 않을 때다. 여지없이 예민해진 입맛은 표정만으로도 나를 잔뜩 긴장하게 만든다.


결혼 초 힘든 나를 이해하기에 주는대로 먹으려고 노력했다던 그이의 숨길 수 없는 민감한 표정은 결국 나를 반찬 노이로제에 걸리게 했었다. 이런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시어머님과 큰 형님은

"아유, 가장 고생하는 네가 힘든 남편을 만나서 애쓴다. 걔가 자라면서 반찬투정이 제일 심했어. 오이 하나로도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 수 있는데 꼭 한 가지만 만들어 준다며 투정부렸던 애야."

"다른 시동생들은 안 그러는데 그 삼촌 입맛이 가장 까다로왔어. 동서가 힘들어서 어떻게 하니?"


힘들기로 말하면 며칠을 소리내어 울어도 모자를 일이나 한편으로는 솜씨 없는 와이프를 만나 먹는 낙도 모르고 사는 그이가 안쓰럽다는 생각에 상쇄하기로 마음을 먹고 살아왔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이 대신 아들 녀석이 나섰으니 결국 나는 가족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욕구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무능한 아내이자 에미가 된 셈이다.


"엄마, 나는 엄마가 김치 담는 모습이 가장 예뻐."하고 말하는 딸과

"나는 엄마가 담아주는 김치가 제일 맛있더라."추켜주는 아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한동안 다른 것은 몰라도 내 가족이 먹는 김치만큼은 내 손으로 직접 담가서 먹여야겠다는 일념으로 김치담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번번이 통째로 버리고 마는 실패를 거듭한 뒤부터는 아예 포기하고 사먹고 있는 상황이다.


며칠 전 어머님 생신 날 큰집에 갔는데 어머님께서 우리가 마음에 걸려 김치를 담아오셨다며 크고 작은 비닐봉지가 여러 개였다. 당신 몸도 편찮으신데 삐쩍 마른 손자를 위해서 손수 농사지은 배추에 들깨까지 흠씬 넣어서 맛깔스럽게 담아주신 김치를 조심스레 통에 옮겨담다가 그만 소리내어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부모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깡마른 손자가 제 어미가 바쁜 탓에 좋아한다는 새 김치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사나 싶어 어머님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친정어머니가 아프기 전까지는 챙겨서 보내주셨지만 이젠 아무것도 못하실 정도가 되셨으니 나라도 담가주어야지. 몇 번이나 담가주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맛이 없어도 엄마 정성으로 알고 맛있게 먹어라."


팔순이 되신 시어머님의 정성을 내 어찌 모르랴. 갖은 양념과 빛깔 좋은 고춧가루의 먹음직스러운 김치는 아니더라도 어머님이 담가주신 김치라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더 없는 소중하고 맛있는 김치라는 것을. 좀처럼 볼 수 없는 들깨범벅의 김치가 어머님의 크신 사랑이라는 것을 알기에 허실없이 맛있게 먹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어머님이 담가주신 김치만을 먹고 살 수는 없다. 이젠 내가 담가서 양쪽 어머님께 드릴 수 있도록 늦었지만 식혜 만들 듯 하나씩 익혀 나가야 할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가족들의 오랜 갈증을 해소시켜주기 위해서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 하고 싶다.


녀석이 문을 열고 눈을 부비며 나온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대뜸

"엄마, 식혜 다 만들었어?"하고 묻는데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한 대접 가득 떠다주곤 즐겁게 녀석의 품평을 기다리는데 어이없게도 일침을 놓는다.


"어, 맛있는데~! 그런데 엄마가 이렇게 맛있게 만드는 것을 보니까 식혜 만드는 것이 가장 쉬운 건가봐. 엄마가 맛있게 하면 다른 사람들은 식은 죽 먹기라는 거잖아. 안 그래?"

시도때도 없는 녀석의 장난끼는 누굴 닮았을까?아들 덕분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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