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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H Oct 31. 2020

취한 이의 용기는 어디로

잃어버린 고집을 찾아 기억 속의 '작' 더듬어보기

적당한 술은 모든 이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잠시나마 몸을 덥히고, 긴장된 근육들을 풀어주며 심장의 엔진은 힘차게 돌아간다.

용기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겨나고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옆자리 아리따운 혹은 멋진 이의 전화번호, 머릿속에만 있었던 아이디어, 싸웠던 이와의 화해, 부자지간 털어놓지 못했던 한마디에 이르기까지 술 한잔의 힘으로 수많은 삶이 바뀌거나 나아지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술을 마실 용기, 아니 객기가 없었다.

좋지 않은 의미로 선구자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이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는 의무감 때문에 밖에서 마시는 술 한 잔은 용기가 아닌 객기에 가까웠던 한 해였으니까. 

아쉬운 대로 집에서 종종 한 잔을 기울여봤지만, 집에서는 술 한잔의 용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집은 내게 휴식을 취하는 곳인가 보다.


마지막으로 용기를 가져보았던 적이 언제일까.

작년 4월 경, 서울의 숨겨진 술 명소들을 찾아다니면서 고집쟁이 몇 분을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놓았던 펜대를 다시 잡은 첫 프로젝트였다. 고집스럽게 본인들의 기개를 술 안에 펼쳐놓는 주인장들을 인터뷰할 때 술 한두 잔은 빠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술 한두 잔 속에 들어간 용기라는 녀석이 지금까지 글 속에 생각을 녹여낼 수 있는 훌륭한 촉매제가 되고 있다. 


많았던 장소들 중 논현동의 고집쟁이가 특히 생각난다.  

'절대 망하지는 않아야 되는데, 제발 너무 알려지지 않았으면 싶은 곳'

'나만의 아지트라, 남한테 알려주기는 아까운 곳'


몇 달 뒤에 다시 방문할 때, 저 빗자루도 그대로 있기를

논현동 구석까지 굳이 찾아오는 이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알려진 전통주 바, '작'이다. 

절대 먼저 마실 술을 추천하지 않는 이 곳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용기에 의존해야 하고, 주인장도 인내하며 기다린다. 퇴근하고 마시는 술 한 잔조차 동료나 상사 또는 친구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에서, 어렵사리 방문한 이 곳에서만큼은 나의 용기에 운명을 맡겨보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치유가 아닐까. 본인의 술은 본인이 가장 잘 느낀다는 촉을 최대한으로 존중하는 이 곳에서, 누구나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밖에서 낼 수 없었던 용기를 내어 모험을 시도하곤 한다.


당시 나의 용기의 근원은 아름다움이었다. 

굴곡지면서도 투명했던 술병이 너무 예뻐서 선택했던 오미자주 '고운달백자', 그리고 예쁜 술에는 모양 좋은 안주가 제격이라고 생각하여 주문했던 카프레제. 술맛과는 1도 상관없는 매력에 근거하여 시도했던 무모한 도전이 의외로 궁합이 꽤 괜찮은 조합이었을 줄이야. 

강한 향이 나는 고도주 특유의 뒷맛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향이 강하지 않은 안주가 제격이래나. 술 한잔의 용기는 가끔 이렇게 큰 보상으로 이어지곤 한다. 



'작'의 사장님도 원래 평범한 직장인이셨다고 한다. 조주(造酒)를 취미로 하다 우연히 낸 용기 한 번이 여기까지 이어져 온 것이라고 담담하게 털어놓던 이야기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한 잔을 더 털어 넣었다. 식도를 타고 들어가는 술이 점차 따뜻해지며 심장을 고동치게 만드는 순간, 직장을 다니면서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불안은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용기가 1년 반 동안 나를 지탱하고 있으니, 술 한 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많은 이들이 고집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근거 없는 자신감. 명확한 근거 없이 단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같은 무모함에 가까운 자신감이 간혹 필요한 순간이 가끔은 있다. 그런데 올해는 그런 자신감을 부리기에 너무 무서운 세상이었을까. 많은 이들이 그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 같다.

어느덧 가을 옷들도 옷장 안에 들어가고 있고, 코트와 패딩이 슬슬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자연마저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계절, 술 한잔과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불꽃이 조금은 더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논현동의 작은 공간, '작'에서 받았던 용기 한 잔이 매우 그리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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