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ianH Sep 19. 2020

마지막 들숨, 날숨의 기억

북한강 왈츠앤닥터만,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선율을 기리며 

모처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다.  

도시를 찢을 듯했던 태풍이 지나고 맞이하는 맑고 건조한 날은 일 년에 몇 차례 보기 힘든 특수다. 춥지 않고, 덥지도 않은 이런 이상적인 날을 나들이 없이 집에서만 보내면 억울한 법. 시원한 물 한 병, 자전거 한 대, 경쾌한 음악 리스트 한 묶음과 함께 잠시나마 나만의 여행을 누리고 왔다.

페달을 밟기 시작하면 시원한 바람의 숨결, 따스한 햇살로 구성된 기분 좋은 선물이 밖에 어렵사리 나온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힘차게 요동치는 근육들과 흘리는 땀방울들이 잠시나마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니, 이만한 건강한 운동이 따로 없다. 


하지만 오늘도 숨을 크게 들이마시지 못했다. 

마스크 특유의 화학물질 냄새와 뒤섞여 코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필수재일 뿐, 밖에 나온 짜릿함을 만끽하게 해줄 수 있는 사치재가 될 수 없어 서운하기 짝이 없다. 언제쯤 얼굴의 절반을 둘러싼 필터를 '안전하게' 끊어버릴 수 있을까. 

손에 잡힐 듯 말듯한 맑은 공기의 유혹을 잠시라도 느끼려고 하면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야 하고, 주위를 한번 다시 둘러보고 마스크도 살짝 내려야 한다. 당연하게 누려왔던 게 이렇게도 어렵고, 아쉽고 그리운 순간.


1년 전의 남양주에서 발견했던 싱그러운 커피 향이 문득 생각난다.

싱그러운 날씨의 토요일, 갑작스럽게 결심했던 남양주 여행은 시작부터 삐그덕 댔다. 힘겹게 주차하고 들어갔던 '타칭' 초계국수 맛집은 똠얌꿍 수준의 신 맛으로 인해 쓰디쓴 교훈만 맛본 채 절반을 남기고 나와야만 했다. 미각은 잃어버리기 직전이었고, 돌아가는 길은 벌써 차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 이미 뒤는 없었고, 만회할 수 있는 디저트라도 즐기기 위한 끝없는 헤맴이 시작되었다.  

계획되지 않은 여행은 항상 변수를 낳는다.

유명한 카페들은 겉으로 보기에도 사람으로 가득하고,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굽이치는 도로만 보이고 카페의 흔적들은 갈수록 없어지고 있었다. 말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점점 이대로 돌아가면 펼쳐질 스트레스의 향연이 걱정되기 시작하던 찰나, 우연히 눈에 들어온 고즈넉한 건물. 30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카페이자, 커피 박물관이기도 한 왈츠앤닥터만은 이렇게 잘못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쯤 눈 앞에 나타나 주었다.  


1989년, 카페 왈츠앤닥터만은 개업일부터 클래식하다. 

매니저분의 단정한 와이셔츠, 넥타이에서는 오래된 호텔리어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자부심이 보인다. 북한강을 따라 20년간 빠짐없이 커피를 서빙해오셨다는 자신감은 삐그덕거리는 목재 바닥, 곳곳에 진열된 오래된 가구들과 어울려 주문한 커피에 대한 기대치를 끌어올려준다. 



창밖으로 보이는 북한강과 어우러질 음료들이 등장했다. 찬 물에 천천히 내린 콜드브루 한 잔, 초콜릿 토핑이 듬뿍 들어간 아이스 카푸치노 그리고 블루베리 치즈케이크 한 조각까지. 시원한 커피 한 모금, 유분기가 가득한 치즈케이크 한 조각의 맛은 잔잔히 흐르는 강의 풍경과 어우러져 빡빡한 삶을 잠시나마 멈추게 한다. 

커피를 다 마시고 잠시 강가를 따라 산책을 다녀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물과 공기를 들이쉬는 것조차 제한이 있는 요즘, 걱정 없이 보고 마실 수 있었던 북한강의 물과 신선한 공기가 그립다. 스마트폰 안에서만 추억으로 남지 않고, 언젠가는 벗어던지고 싱그러운 기억을 업데이트할 수 있는 날이 얼른 오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