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확신 속에서, 블랙베리 속의 프랑스 추억하기
여행이 또 사라졌다.
호캉스를 벌써 두 번째 취소했다. 푹신한 침대, 널찍한 TV, 드넓은 욕조가 이제 내 곁을 다시 떠났고, 미리 사놓았던 주전부리들만 갈 입을 잃은 채 방에서 헤매고 있는 중이다.
어렵사리 낸 휴가를 방에서 보내는 것은 괜찮다. 쉬는 곳보다 쉬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
비가 오려는 우중충한 날씨는 커튼으로 안 보면 되고, 무료함은 영화와 책이 있으니 괜찮다. 그래, 호캉스는 가지 못하는 여행에 대한 하나의 대체재였을 뿐이니까. 이렇게 스스로에게 위안 아닌 위안을 던져보며 길고 긴 연휴를 집에서 보내고 있다.
하지만 확신이 사라졌다는 것이 무섭다.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그동안의 유행병에 대한 당연한 기대, 여행을 다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다져진 힘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고도 두렵다. 우리는 두 번 다시 어쩌면 해외로 떠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 지역, 내 나라는 그나마 방역을 안전하게 했는지라도 물어볼 수 있지만, 다른 곳은 그럴 수가 없으니까.
창문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마스크를 들고 지켜보고 있을 엄마 아빠의 걱정과는 별개로, 자기들만의 테마파크에서 뛰어놀기 정신없는 그들이 부럽다. 해외도 몇 차례 갔다 오고, 국내도 심심치 않게 돌아다니며 먹을거리, 쉼거리를 찾아다니는 내가 동네 앞 놀이터도 부러워할 지경이 되었다.
부러운 마음에 클라우드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들을 열어봤다. 1월에 다녀왔던 프랑스, 이탈리아 폴더가 눈에 들어온다. 조금이라도 젊을 때, 걷는 여행의 짜릿함을 하나 더 간직하고 싶어 선택했던 니스-모나코-로마 코스. 오늘은 여행이나 한번 더 떠나야겠다.
니스의 몽돌해변은 묘한 평화로움이 깔려 있다.
푹신푹신한 모래 대신 아기자기하게 깔린 이 조약돌들은 걷는 이에게 몽글몽글한 부드러움을 선사하곤 한다. 그런 부드러움을 2km 가까이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아무 생각 없이 계속 걷기만 해도 마냥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 자신들만의 테마파크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처럼. 4년 만에 다시 돌아왔지만, 아침에 일어나 해변가를 산책하고, 바게트 한 덩이를 갈색 종이봉투에 담아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와 사랑하는 이와의 아침을 준비하는 니스인들의 일상은 바뀐 것 하나 없이 여전히 조용하고 따뜻했다.
모나코는 오래된 도시의 화려함과 고즈넉함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중심가는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할 듯한 요트와 스포츠카들이 자태를 뽐내고, 서쪽의 신시가지는 화려한 주택들과 카지노가 정점을 찍고 있다. 그리고 동쪽 구시가지에는 7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택들이 국왕 알베르 2세와 함께 천천히, 고고하게 세월을 지켜보고 있다. 부유하다는 말을 쓸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은퇴한 후 이 도시에서 어찌나 살고 싶던지.
비가 계속 내리던 로마는 클래식한 매력이 듬뿍 느껴지는 도시였다. 수십 년에 걸쳐 숙성된 위스키처럼 강렬하면서도 우아한 미(美)가 도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길거리 신사 숙녀들의 옷차림과 몸가짐, 무심하게 내려주는 쓰디쓴 에스프레소 한 잔, 신선한 피자를 내주시는 주방장의 웃음, 수도 없이 걸어간 보도블록 하나하나에서까지 아우라가 느껴졌다. 한 때 자기들의 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했으며, 위대한 유산을 수도 없이 만든 곳의 수도답구나.
어쩌면 마지막 여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바깥 편의점에 가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이 시점에서, 상실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매일같이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이 편치는 않다. 잠시나마 행복했던 블랙베리 속 랜선 여행을 벗어나, 맑은 날씨 아래에서 음악을 틀고 떠나는 하루를 만끽하고 싶다.
상실한 확신이 돌아올 수 있는 날이 곧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