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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H Sep 08. 2020

오늘도 아무 일이 없었다

의외의 행적, 저장된 술 한잔을 돌아보는 시간

오늘도 아무 일이 없었다.

똑같은 퇴근길. 생활 속의 거리두기라는 한결같은 테마와 함께 집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똑같은 퇴근 후. 손 씻고, 또 씻고, 저녁 먹고 노트북을 열어보는 매크로 같은 되풀이.  

드디어 한 가지 선택지가 생겼다. 넷플릭스에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볼까, 유튜브에서 오늘의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볼까. 생각해보니 어제도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오늘도 아무래도 잠들기 전까지 똑같을 것 같다.  


사라진 뜻밖의 일상.

퇴근길은 항상 뜻밖의 연속이었다. 집에 그냥 혼자 갈까, 그 사람을 보러 갈까, 아니면 또 다른 의외의 인물을 불러볼까. '누가' 정해지면 '어디서'가 다시 수많은 선택지를 제시한다. 종종 가고, 적어도 쪽박은 차지 않는 곳? 아니면 가보기로 항상 벼렀지만 약간은 불안한 곳? 아니면 오늘의 운명은 어플에게? 샤르트르의 명언처럼 B와 D 사이의 C까지는 아니라도, 수많은 맛들이 분위기와 사람과 함께 뒤섞여 그날을 즐겁게 해 주던 시절이 불과 몇 달이 안 되었다. 집에 조금 늦게 들어가는 것이 다반사였던 몇 달 전, 그렇게 발견했던 수많은 곳들을 하나하나 구글 지도에 표시해놓고 어디에 쓸지도 모르는 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때가 그립다.


세상이 바뀌었다. 

퇴근 후에는 집에 바로 가는 것이 불문율이고, 집에 들어가면 웬만하면 밖을 나서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시대. 

맛있는 음식, 술 한 잔을 마시러 나간다는 것 자체가 따가운 눈초리를 감수하고 두려움을 야기하는 시대. 

'어제 여기 괜찮더라' 하는 일상적인 리뷰 하나가 설렘은커녕 검사받아보라는 말부터 부르는 불신의 시대.

발걸음이 좁아지고, 시야가 좁아지고, 최근 볼 얼굴들마저 줄어드는 뒤바뀐 세상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바(Bar)에 가고 싶다.

더 이상의 의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오늘 또 다른 뜻밖의 미를 보여주는 곳. 동화책 속의 앨리스처럼 이상한 세상에서 여행을 하다 보니 카드값이 예산을 훌쩍 초과한지도 잊어버리는 매력을 가진 곳. 매번 가는 곳이 있어도 매번 다른 감동을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곳, 바 테이블 앞에서 술 한 잔이 마시고 싶다.

많은 곳이 생각난다. 서울의 유일무이한 전통주 바 '작', 학창 시절의 아지트 '로빈스 스퀘어', 어릴 적 꿈을 생각나게 만드는 '셜록', 술을 마시는지 음악을 들으러 가는지 모르겠는 '겟올라잇', 누구도 모를 것 같은 굴 속의 집 같은 '무디'까지. 그 외에도 발걸음이 닿았던 많은 곳들이 여전히 수많은 색과 향들을 품은 채 기다리고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찍어둔 사진으로 기억이라도 되살려야지.



블랙베리 앨범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이너스'에서 찍어두었던 못난이 사진 한 장밖에 없다. 아마도 끝잔으로 가장 좋아하는 '글렌모렌지 퀸타루반'이 아니었을까. 다행히도 친한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났던 무더운 날, 한남동 지하에서 광부들의 세계에 들어와 마셨던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술 한 잔과 주고받았던 근황들이 파피루스처럼 펼쳐져 다행이다. 바 테이블만 잠시 곁에 없을 뿐이지, 이야기는 그대로 살아있다.


내일은 조금이라도 다른 하루가 될 수 있을까. 

어느 순간, 내일의 퇴근길을 기대할 수 있기를 바라며 얼마 전에 사둔 미니 코냑 한 병을 꺼내야겠다. 치즈도 조금 잘라보고, 아쉬운 대로 소시지 대신 질러 육포라도 한 팩 먹어야지.

꽤 긴 시간 동안 달아난 뜻밖의 순간들이, 이제는 많이 그리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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