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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H Oct 18. 2020

'나'를 잃었다

잃어버린 내 모습이 서산 호숫가에서 돌아온 이야기

오랫동안 묵혀왔던 가이드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직장에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52시간 근무제로 인해 저녁을 더 확실히 사수할 수 있었다.

영어 공부를 더하고, 자격증 준비를 위해 책을 사고 인터넷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차를 타고 서울의 명소들을 돌아보고, 기억해야 할 내용들을 기록해뒀다. 평시에 눈여겨보았던 노포들이나 레스토랑들을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기 시작했다. 꿈을 향한 발걸음이었던 만큼 거침이 없었고,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늘 행복이 가득했다. 그 녀석이 갑자기 일상 속에 스며들기 전까지는.


하늘, 물, 땅에는 사회적으로 드높은 벽이 세워졌다. 

사회적으로 이동이 제한되었다. 익숙한 이조차도 두려워해야 하는 때에 낯선 이와 만나 함께 돌아다니는 꿈은 신기루에 불과했다. 마스크와 소독제가 품절이곤 하던 시점에 살아 숨쉬는 역사의 흔적들을 보고, 만지고 호흡하는 것은 도전을 넘어선 객기에 불과했기에, 2021년에 꿈꿨던 내 모습이 점차 사라지는 모습을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컴퓨터 앞에서 숫자를 검증하고, 데이터를 만들며 보고서와 제안서를 만들어야 하는 하루는 6년이 지난 지금도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늘 새로운 모험을 꿈꾸는 내게 모험을 할 수 없는 관리자로서의 삶은 결코 쉽지 않은 것 같다. 어렵사리 그 삶에 통한 탈출구를 찾았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녀석 때문에 막혀버리니 희망과 설렘 대신 슬픔, 분노 그리고 걱정이 쌓여가고 있었다. 앞으로 꿈 따위는 꾸지도 말고, 지금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부정의 장벽이 마음속에 완성되었을 때, 마주하게 될 내 모습이 두려웠다.  

그래서 잠시라도 익숙한 출퇴근길, 한강 다리, 서울 시내를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고 운전대를 잡았다. 드라이브스루 매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햄버거 세트를 집어 들고, 고이 모셔놓았던 플레이리스트를 틀고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쭉 내려가다가 보면 태안반도에 자리 잡은 서산에 도착하고, 거기서 내륙으로 조금 들어가면 해미면을 거쳐 황락리라는 낯선 곳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자리한 황락저수지와 펜션 두 곳, 마음속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다시 내 모습을 되찾을 '제로플레이스'와 '수화림'이 있다. 


세상에 남은 이가 나밖에 없는 듯 고요하다.

저수지를 반 바퀴 둘러 펜션이 자리한 야트막한 언덕으로 갈 때부터 주변이 조용해진다. 흔하디 흔한 풀벌레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는다. 생명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간혹 들리는 새소리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소음에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은 오랜만이다.

차를 세워놓고 잠시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수위가 조금 올라갔는지 반쯤 잠겨 있는 야트막한 지대의 나무들이 가지만 빼꼼 내밀고 마주 보고 있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갇힌 것처럼 손을 내밀고 구원해달라는 듯했다. 평시 같았으면 잔가지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고 묘사했을 텐데, 물가에 비친 마음속을 거울로 들여다보니 몹시 힘든 한 해였나 보다.

물은 잔잔하다. 물결의 흐름이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일정하고 부드럽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저 물처럼 반복적으로 흘려보내야 되는 것인가. 올 때만 하더라도 요동치던 마음속의 파도가 어디론가 흘러가는 물을 보면서 점점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시간 걸리고, 치킨 한 마리 배달하기조차 어려운 이 곳에 그래서 오고 싶었을까.


저수지의 한 면을 사이에 두고 정적을 달콤한 휴식으로 바꿔줄 숙소가 두 곳 자리하고 있다. 건축 에이전시 '지랩'에서 디자인한 '제로플레이스' 그리고 '수화림'. 아무것도 없는 곳, 물과 꽃과 숲이 있는 곳이라는 두 곳의 이름이 오늘따라 참 예쁘다. 거침없던 발걸음이 뭔가에 무겁게 걸렸을 때, 잠시 앉아서 떼어내고 가기 좋은 두 곳.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수화림'은 이전에도 종종 방문하곤 했었다. 단순하면서도 아늑한 디자인, 객실에 따라 스파까지 있어 조금 더 따뜻한 휴식이 가능한 곳. 무엇보다도 사회의 묵은 때를 벗겨낼 수 있을 정도로 자연 빼고 아무것도 없는 곳.

아무도 없는 듯한 이 곳에서 하룻밤 동안 모든 것을 돌아보고 나면, 아침에 활짝 웃는 해와 함께 나쁜 생각들을 모두 날려 보내곤 했었다. 오늘도 늘 날려 보냈던 이 장소에서, 내 발목을 잡았던 장애물들이 모두 사라지기를 잠시 바라보았다. 내년에는 지금보다는 더 나아지기를.


마음이 어느 정도 비워졌으니, 채울 차례다.

강 근처에 있는 '제로플레이스' 뒤편으로 올라가다 보면 지도상에 지명조차 없는 언덕길이 있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뒷산이라기에는 생각보다 깨끗하게 뚫려 있는 등산로. 이름조차 모를 그곳에 갈대와 함께 뜻하지 않은 채움이 기다리고 있다. 



시원한 공기로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채워나갔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고 흔들림이 없는 이 곳에서 지난날들을 한번 잊어버리기로 해본다. 호사다마라고 했다. 정도를 지키며 길을 따라가다 보면, 좋은 일과 나쁜 일은 항상 따라오는 법이니 속는 셈 치고 한번 흘려보내려고 한다.

오늘 가득히 채운 공기 한 모금이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를 빌며, 뜻밖의 서산 일탈을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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