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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H Oct 03. 2020

누가 머릿속의 노포를 훔쳐갔을까

사라진 냄새, 머릿속에만 남은 오래된 가게 이야기들

오래된 가게에서는 냄새가 난다.

수십 년간 같은 재료, 기름, 양념과 땀이 뒤섞여 벽지에까지 배어버린 냄새, 드나들었던 수많은 이들이 남기고 사라진 여러 냄새들이 뒤섞여 그 가게만의 '체취'를 남긴다.

노포라는 개념 자체조차 낯설 무렵, 처음 들어갔던 닭한마리집은 그 냄새조차 낯설었다. 수십 년간 드나든 할아버지 할머니 손님들만을 위해 높게 세워진 장벽 같아 보였던 이 냄새는 어린 내가 극복하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였다. 괜히 긴장되고, 목소리는 소심해지고 음식도 괜히 빨리 먹고 나와서 그래도 노포를 한번 방문해봤다는 데이터 수집에 대한 무의미한 자부심을 가지곤 했다. 

낯섦과 주저함의 세월이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나이가 들어가는 만큼 뻔뻔해지는 법인지 편안하게 스테인리스 컵에다가 물 한 잔 시원하게 마시고, 처음 와서 그런데 숨겨진 먹을거리 없냐면서 이모, 누나, 어머니 등과 같은 사회적인 호칭까지도 주저 없이 붙이고 있다.

     

오늘은 그 기억들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팬데믹 이후 계절이 선선해지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바뀌면서 마지막 노포행 (老鋪行)이 벌써 1년을 바라보고 있다. 매일같이 무언가가 사라지는 상실의 시대 속, 얼마 남지 않은 맛과 냄새들을 잃고 싶지 않아 기억들을 더듬어 그 장소들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첫 노포의 기억은 대학교 1학년, 수업 끝나고 집에 절.대 바로 가지 않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내기로서의 자유를 누려보고 싶어 어떻게든 건전한(?) 일탈 거리를 찾아 각종 맛집들을 섭렵하던 시절, 우연히 지나갔던 동대문에서 발견한 닭한마리 가게, 42년짜리 노포 '진옥화할매원조닭한마리'.

푹 끓여내어 흐물흐물해질 정도로 살이 풀리는 삼계탕, 매콤한 맛의 닭개장과는 다르게 닭한마리는 통으로 들어간 닭과 진하고 구수한 육수가 떡, 감자사리 등과 어우러져 특유의 삼삼한 맛을 낸다. 갓 들어간 닭을 고이 삶으면서 탱글탱글한 살을 찢어 즐기다가, 떡과 감자사리를 넣어 진하게 우려낸 본식을 즐기고 마지막에 칼국수까지 넣어 남은 국물까지 싹 먹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렇게 든든하고 따뜻할 수가 없었다. 소중한 이들에게 닭한마리를 입문시키고자 할 때 조심스럽게 공개하곤 했던 집이었기에 (물론 그러기에는 너무 유명하긴 하다), 고스란히 남아있는 모습이 감사하기 그지없다.    


감자국은 또 어떠한가? 

잡내가 살짝 들어간 돼지등뼈, 씹을수록 달달한 감자 몇 알, 알싸한 깻잎과 고소하면서도 씁쓸한 들깻가루의 향이 매콤하면서도 구수한 육수와 섞였을 때 나오는 진하면서 살짝 매콤한 감자국

누가누가 더 자극적인가를 대결하는 듯한 '요즘' 감자탕과는 다르게, 성신여대 앞 돈암동 시장을 63년째 지키고 있는 '라떼'의 감자국 노포가 있다. 뚝배기에 담겨 나오곤 했던, 저렴하고 푸짐하면서도 원기까지 북돋아야 했던 불가능한 미션을 수십 년간 달성해온, 원조도 아닌 '태조감자국'이다.

성신여대 앞의 감자국집은 역시 대학 시절의 로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금남의 구역이라고 알고 있었던, 들어가 보려고 하면 쫓겨나는 줄로 알고 있었던 여대를 구경 간다고 먼 길을 나섰다가 별 소득(?)도 없이 돌아서야 했던 그때 무심코 들어갔던 가게. 감자국을 잘 몰랐던 내가 감자를 좋아하니까 저녁이나 먹고 가자고 했던 가게. 남자 셋이서 왔으니까 메뉴판에 적힌 대로 '무~진장' 먹어야겠다고 욕심부리다가 배 터질뻔했던 가게.

그때 보았던 너저분한 벽은 리모델링을 거쳐 깨끗한 벽으로 바뀌었고, 종이마저 세월을 듬뿍 마셨던 메뉴판은 멋진 액자에 담겨 전시되어 있지만 당시의 진한 국물 한 숟갈과 술 한 잔의 추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금은 사라진 곳도 있다.

학교 후문 뒤, 집으로 가는 길을 늘 가로막았던 상수역의 파스타 가게 '달고나'.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공강 시간에 혼자 크림 파스타도 먹어보고, 소개팅에서 마음에 들었던 당신을 데려가 보기도 하고, 졸업식 이후 부모님을 모시고 식사도 하고, 결혼을 꿈꾸는 그대를 데려가기도 했던 추억의 장소.

크림을 가득 넣고, 이탈리안 소시지를 듬뿍 썰어낸 살시차 파스타를 매번 찾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자리에 앉은 후 늘 20분 이상을 기다리면서 혼자, 혹은 여러 이들과 나눴던 즐거운 생각과 이야기들도 생각난다. 그런 추억들이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그대로, 누가 꺼내 주기만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


하지만 잠들다 지쳐 영원히 사라져 버린 노포들도 있다.

이름과 메뉴는 생각나지만, 그 속의 추억들은 이제 저 멀리 날아가버린 곳들.

남이 주는 술이 아닌, 내가 마시는 술의 짜릿함을 느끼게 해 주었던 곳은 희미하게 그림이 그려질 뿐, 장소가 기억나지 않는다.

고된 면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배고파 들렸던 고깃집은 아예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는다.

팬데믹에 빠지기 전, SNS에서 보고 찾아갔다가 감탄을 금치 못했던 광장시장의 육횟집은 그 수많은 곳들 중 어디였는지 긴가민가하다.

누가 내 머릿속의 노포들을 이렇게 훔쳐가고 있을까. 그리고 언제 다시 꺼낼 수 있을까.

더 이상 귀하게 저장해두었던 기억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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