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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집 남자의 이상한 계산법

보령 대보주택 이야기

by 편성준


'보령 한 달 살기' 덕분에 보령의 매력에 젖어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덜컥 집부터 살 수는 없었다. 아내와 나는 일단 월세를 살면서 마음에 드는 집을 천천히 찾아보기로 했다. 아내가 보령 출신 지인에게 믿을 만한 보령 사람을 좀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만난 사람이 지금 살고 있는 월셋집 주인이다. 처음엔 그냥 지역 유지라고 해서 만났는데 대뜸 "괜찮은 집이 하나 있다"라고 해서 가 보니 본인 소유의 연립주택이었다. 다소 황당하긴 했지만 '뭐 그러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흔쾌히 그 집을 둘러보았다. '대보주택'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연립주택은 보령에 탄광이 있던 시절 광부들의 사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모든 게 너무너무너무 낡아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입을 딱 벌리고 황당해하니 주인은 아이들이 어릴 때 잠깐 살던 집인데 이사를 간 뒤 월세 주고는 그동안 한 번도 와보지 않았다고 했다. 아마도 이십여 년 간 한 번도 가구나 벽지를 바꾸지 않은 것 같았다(욕실이 새서 한 번 공사를 한 적은 있다고 한다). 집안은 심란했다. 벽엔 낙서 천지였고 문짝들도 오래되어 잘 열리고 닫히지 않았다.


조건은 보증금 이천만 원에 월세 40만 원이었다. 아내는 그 조건에 동의하면서 주인에게 도배와 바닥 장판은 새로 해야 할 것 같다며 비용을 달라고 했더니 100만 원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도배·장판을 어떻게 백만 원에 다 할 수 있겠냐며 쳐다보니 "싫으면 안 들어와도 된다"라고 막판 배짱을 부렸다. 집을 소개할 때의 친절함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가 알아서 하기로 하고 그 돈을 받고 직접 도배를 감행했다(도배하는 날 하필 나는 진주문고에서 '읽는 기쁨' 북토크 일정이 잡혀서 경남 진주로 갔고 아내와 자란 님이 무척 고생을 했다). 도배 공사 결과 이전과 얼마나 달라졌던지 웅진코웨이 관리사 아주머니가 방문해서 "여기가 진짜 대보주택 맞아요?'라고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밝고 깨끗한 집. 에니어그램 1번(완벽주의자형)인 아내의 집념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문제는 싱크대였다. 구식이라 작고 좁은 건 둘째치고 경첩이 낡아 문이 닫히지도 않았다. 나사를 조이면 되겠지 하고 덤벼 보았으나 이미 여러 번 조이고 풀어 구멍들이 모두 겉돌았다. 아내는 이런 싱크대에서는 뭔가 살림이나 요리를 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집 남자에게 싱크대 교체를 요구했더니 싱크대를 바꾸려면 130만 원이 든다며 곤란하다고 했다. 원래 주인이 이런 건 다 고쳐 주는 거 모르냐고 물었더니 이전 집은 아무 항의 없이 잘 썼는데 왜 너희들만 난리냐고 되려 눈을 부라렸다. 또한 도배업자와의 통화를

들려 주길래 어떻게 녹음을 했길래 우리에게 이렇게 들려주시는 거냐 물으니 '내 전화기는 자동으로 모든 통화가 녹음이 된다'라며 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정치 이슈 때마다 등장하는 '녹취록'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일이 통화를 다 녹음하고 살고 있었구나.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화 녹음을 쌓고 살고 있는 걸까, 그 녹음 녹화 분량을 보관하는 클라우드는 어디에 있는 걸까 등등 온갖 잡생각들이 몰려왔다(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죄송하다).


우리는 여기서 딱 일 년만 살자고 다짐하고 월세 1년 치 480만 원을 한꺼번에 냈다. 보증금과 월세를 냈으니 세입자로서 싱크대 정도는 교체해 달라고 다시 얘기해 보았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대신 이런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1년세 480입니다.

도배장판보조비100

싱크대130.

합230.

250÷12=

20.?

제 계산방식입니다.


싱크대까지 바꿔주면 자기는 한 달에 20만 원의 월세를 받게 된다는 이상한 계산법이었다. 저절로 욕이 나왔다. 친구들과 해외로 골프를 치러 다닌다고 자랑하던 사람이 어떻게 이런 문자를 보낼 수 있을까. 잘산다는 게 이런 거라면 나는 잘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런 소동을 겪으며 대보주택으로 이사를 왔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아내는 보령이라 멀기도 하지만 집이 너무 좁고 낡아서 서울 사는 친구들을 초대하지 못하는 게 늘 불만이다. 우리가 집을 사서 고치는 데는 그런 바람도 들어 있는 것이다. 친구들이 놀러 와 같이 음식을 해 먹고 수다를 떨 수 있는 곳 말이다. 물론 새로 이사 가는 집도 너무 좁아서 친구들을 재울 수는 없겠지만 필요하면 우리가 보령 한 달 살기 할 때 묵었던 그랜드베이 호텔을 소개해 주면 될 것이다. 한 달이나 살았던 곳이라 호텔 지배인님과도 친분이 있다.


아내와 나는 대보주택에 이사를 오면서 금세 이웃분들과 친해졌다. 우리 옆집엔 노인 부부가 살고 아래층에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화단에 고추농사도 지으신다. 103호 할머니가 텃밭에서 기른 배추를 줘서 김장도 해 먹었다. 알고 보니 103호 할머니는 101동의 대장님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단지 앞 공원 벤치에 나가 책을 읽다가 할머니들에게 인사를 해서 얼굴을 익혔다. 할머니들은 아주 춥거니 덥지 않을 때면 매일 아침 단지 앞 평상에 모여 앉아 커피타임을 갖는다. 할머니들은 목청도 좋아서 5분만 지나면 나는 책장을 덮어야 한다. 깔깔깔 웃는 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니까.


어디서나 삶은 있다. 대보주택에서의 1년도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6월부터 펼쳐질 구도심 주택에서의 삶은 또 어떤 모습이 될지 사뭇 궁금하다. 아, 다음 주부터 보령시립도서관에서 독서동아리 운영자로 활동하기로 했다. 가을엔 인문학 특강도 기획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주부터 서울에서 시작하는 여행작가학교 동문회 글쓰기 강연도 오늘 준비해야 한다. 보령에서의 삶이 기지개를 켜는 기분이다.


*오늘의 맞춤법 : '잘살다' 와 '잘 살다'

잘살다 :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산다는 의미임.

잘 살다 : 재산과 관계없을 때 사용. 바르게, 훌륭하게 산다는 뜻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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