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석·임상춘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의 성패를 가르는 요인은 독자와 관객이 주인공의 여정에 동참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주인공의 고난과 역경이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면 냉정한 관찰자로 남겠지만 그게 내 일처럼 느껴진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함께 울고 웃고 달려간다. 우리가 아이유, 박보검 주연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며 오열하는 건 과거를 절묘하게 재현한 복고풍 드라마라서가 아니라 '요망진 반항아' 오애순과 '팔불출 무쇠' 양관식에게서 자신과 나의 부모 모습을 발견하고 각자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원식 감독은 제작발표회에서 "조부모와 부모 세대에 대한 헌사이자 자녀 세대에 대한 응원가"라고 소개했다.
계엄령의 후폭풍으로 몇 달간 너나 할 것 없이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던 대한민국에서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가 단연 화제다. 사람들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주인공이 역경에 맞서는 것을 보고 싶어 하기 때인데 특이하게도 이 드라마엔 빌런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애순이와 관식이, 광례, 금명이가 태어난 한반도의 가난과 풍습, 지정학적 처지 등이 치명적인 빌런이다. 김원석 연출과 임상춘 작가는 '한반도에서 여성의 삶은 왜 이다지도 고달픈 걸까'라는 페미니즘적 질문에서 드라마의 실마리를 푼 듯 같다. 서사는 제주라는 곳에서 '개보다 못한 여성 팔자'로 태어난 가난과 결핍의 삶을 물려주기 싫은 관례와 그의 딸 애순, 그리고 그녀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 기를 쓰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금명의 발버둥으로 이어진다.
가난 때문에 반장 선거에서도 밀려난 어린 애순이가 써서 상을 받아 온 시에서 '전복 팔아 버는 백 환, 내가 주고 어망 하루 사고 싶네'라는 구절을 읽으며 눈물 흘리는 염혜란의 연기엔 나도 눈물 콧물 다 뺄 수밖에 없었다. 이 드라마는 왜 이런가. 시작부터 1970년대 천재 가수 김정미의 노래가 흐르고 "그때 봄이 봄인 걸 알았더라면 까짓 거 더 찐하게 좀 살아볼 걸…" "부모는 미안했던 것만 가슴에 사무치고 자식은 서운했던 것만 사무친다" 등의 명대사가 난무하는 가운데 애순의 엄마로 출연한 염혜란은 물론이고 염혜란의 두 번째 남편으로 나온 오정세, 그의 새로운 여자 엄지원까지 연기를 너무 잘한다. 문소리, 박해준, 나문희나 김용림처럼 주요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잠깐 나오는 오민애, 백지원, 차미경까지 마치 연기 잘하기로 결의 대회라도 하고 나온 사람들처럼 장면 장면마다 찰떡이다. 특히 여관 주인으로 나와 "부산 인심 죽이지예?"라고 속삭이던 강말금과 베란다에서 다이아 반지 던지겠다고 위협하던 가정부 역의 남권아는 씬스틸러를 넘어 잊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폭싹 속았수다'는 이 땅의 불쌍한 엄마 이야기이기도 하고 당차고 로맨틱한 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 여자에 충성하는 남자 이야기이기도 하다. 금명이 세대로 넘어가서는 '개천에서 용 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서로를 보듬고 껴안는 이야기일 진대(같이 가라, 같이 가. 같이 가면 백 리 길도 십리길 된다) 애순 역을 맡은 아이유가 대사를 칠 때는 대개 화면 전체가 울음바다로 변하므로 그걸 바라보는 나도 두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그런데 아이유가 아주 순종적인 얼굴은 아니라서 경찰서에서 자기를 무시하는 형사에게 두 눈 똑바로 뜨고 소리 지르는 애순이일 때는 슬며시 웃음이 비어져 나오고, 시어머니 될 강명주 배우가 온실 속 화초 같은 애들은 꼬인 데가 없어 좋더라, 라고 힐난하는 장면에서 "어머님도 화초는 아니신 거죠...?"라고 맞받아치는 금명이에게서는 짧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이건 자신의 경험과 통찰을 장인의 솜씨로 엮어 조자룡 헌 칼 흔들듯 춤추는 극본과 연출의 공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드라마란 결국 '깨진 삶의 균형을 다시 찾는 이야기'란다. 누구나 걱정 없이 살고 싶어 하지만 그 평범해 보이는 상태가 그토록 어려운 것임을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 또 한 번 깨닫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실버리이닝 플레이북'이라는 영화에서 처음 배운 단어 실버라이닝은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은빛선'을 뜻한다고 한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언뜻언뜻 그 빛을 본 것 같다. 울고 싶을 때 뺨을 쳐주는 드라마임에 틀림없지만 내게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작가의 야심과 PD의 진심이 만든 '눈물의 비빔밥' 같은 드라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