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음식점을 잘 고르는 아내 이야기
가끔은 아내의 '촉'에 놀란다. 그저께 갔던 청소역 근처의 '한일식당'도 그랬다. 미옥서원 가는 길에 적당한 식당을 하나 찾아 점심을 먹자고 했는데 그때 아내가 스마트폰 지도 찾기로 고른 밥집이 한일식당이었다. 페스코 베지터리안인 아내가 웬일로 소머리국밥집을 골랐나 했는데 주문을 한 뒤 나온 국밥의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어보고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메뉴는 소머리국밥 보통과 특, 그리고 수욕이 전부이니 사실상 단일 메뉴다. 아들과 어머니로 보이는 노인 두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다. 맑고 뜨거운 국물은 지친 속을 어루만져 주었고 시원한 배추김치와 통무김치도 직접 담근 김치 특유의 정갈함이 있었다.
오늘 아내는 서울에 있으므로 집에서 20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식당에 나 혼자 또 갔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근처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국밥을 먹고 있었고 내 뒤를 따라 혼자 들어온 중년 남성도 날씨가 쌀쌀한 듯 손바닥을 비비며 국밥을 한 그릇 시켰다. 나는 국밥 보통을 하나 시키고 특은 포장해 달라고 했다. 오늘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맛이었다. 계산을 할 때 벽에 붙어 있는 장애인펜싱 조영래 선수의 사진이 눈에 띄길래 가리키며 "가족인가 보죠?"라고 물으니 "작은 형"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가 촉을 발휘하는 건 음식점 고를 때만이 아니다. 출판기획자인 아내는 좋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예비 작가들을 알아보는 능력도 탁월하다. 상대적으로 타인에 대한 관심이 적고 약간 외골수인 내가 '소행성 책 쓰기 워크숍'을 6~7년째 이어가고 있는 것도 그런 아내 덕분이다. 연극을 자주 보는 편인데 우리 커플이 볼 작품 선택을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기는 이유도 아내의 예술적 안목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쇼핑도 무척 빠른 속도로 한다. 사야 할 물건이 있을 때 가게로 들어가 쓰윽 돌아보고는 몇 분 만에 옷을 사 가지고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신발 매대 근처에 서서 신발에 한쪽 발을 넣어보기도 전에 아내의 쇼핑은 대부분 끝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아내에게도 단점이 있으니 그것은 사람을 너무 잘 믿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빠르게 다가오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사람 좋아하는 아내는 막상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번번이 당하고 만다. 하긴 속이려고 드는 사람은 당할 수가 없다. 올해도 가까웠던 사람의 태도가 급변하고 노골적으로 계속 우리를 밀어내는 바람에 아내가 몇 달간 심하게 속앓이를 했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남의 험담도 곧잘 하곤 했는데 평소의 그런 습성이라면 남에게 가서도 우리 욕을 하고 없는 말을 지어낼 게 뻔하기에 더욱 심란했다.
혹시 우리가 그 사람을 단단히 오해한 건 아닐까, 하는 일말의 염려를 한방에 날려 준 사건이 있었다. 얼마 전 그 사람을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지인에게 아내가 안부 전화를 했는데 그분이 전화를 받자마자 그 사람 얘기를 꺼내며 "아주 나쁜 애"이라고 흥분하는 것이었다. 경력이나 재산 보유액 등 그동안 자신에게 했던 말들 중 대부분이 거짓말이며 심지어 자신을 통해 얻은 인맥을 활용해 사기를 치고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당연히 금전적·심리적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과정에서 우리 커플의 경제적 사정을 넌지시 흘리고 왜곡하는 등 험담을 일삼은 것은 물론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 그 사람에게 피해를 봤다는 다른 분의 전화가 또 걸려왔다. 한밤중에 그 소동을 겪으며 우리는 "그래도 우린 아직 금전적 손해를 보진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하나?"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아직도 아내는 그 사람이 준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아내에게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맷 데이먼에게 했던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라는 대사를 들려주고 싶다. 사람에게 상처받은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야. 그 사람 잘못이야. 그리고 그 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거야. 아마 더 길길이 날뛰겠지. 그러니 그냥 그 사람과의 인연을 끊어내는 수밖에 없어. 좋은 경험 하나 했다고 치고. 언제까지 경험만 하고 살아야 하느냐고? 여보, 인생은 늘 그렇듯 좌충우돌이야. 그래도 당신은 그 특유의 '촉'이 있잖아. 나처럼 무딘 사람보다 당신이 훨씬 낫지 뭘.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