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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Oct 08. 2021

잘 쓴 드라마 대사들은 나를 힘나게 한다

HBO 드라마《올리브 키터리지》

2009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의 열렬한 팬인 나는 그 소설을 토대로 HBO에서 만든 4부작 드라마를 여태 보지 않다가 며칠 전 왓챠를 통해 보았다. 올리브 역을 맡은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얼마나 연기를 잘했는지, 그리고 이 드라마가 발표된 후 이런저런 상을 얼마나 많이 탔는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원작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함부로 시작할 수 없는 드라마였다.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천천히 정주행 하고 싶었다. 역시 명불허전, 드라마는 끝내줬다. 프란시스 맥도먼드는 소설 속에 묘사된 올리브보다 체구는 작았지만 특유의 카리스마가 넘쳤고 유머러스했다.

남편 헨리와 약국에서 일하던  드니즈와의 애처로운 에피소드도 좋았고 작가가 맨 처음 떠올렸다는 아들 크리스토퍼의 결혼식 피로연 장면도 좋았지만 나는 특히 끝부분에 나오는 강변 산책길에서 벤치 앞에 쓰러져 있던 잭 케니슨과의 만남 장면이 좋았다. 쓰러져 있는 남자(빌 머레이가 잭 역을 맡았다)에게 올리브가 가서 "혹시 죽었어요?"라고 물으면서 둘의 대화가 시작된다.


올리브는 남편이 6개월 전에 죽었다고 말하고 잭은 아내가 12월에 죽었다고 고백한다. "그럼 지옥에 살겠군요."라고 말하는 올리브. 벤치 아래 누워 있던 잭은 일어날 수 있겠냐고 묻는 올리브에게 "매일 아침 꼭 일어나야 하는 이유를 하나만 대 봐요."라고 묻자 올리브는 "없는데요. 나도 개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자살할 수 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그녀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비로소 마음을 여는 잭은 흐흐흐 웃더니 "이름이 올리브라고 했던가요?"라고 묻는다.

나는 고약한 유머로 점철되어 있는 이 장면이 좋아서 잠시 노트에 메모를 해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책을 꺼내 그 장면을 다시 찾아보았다. 매일 아침 일어나야 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나 개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대신 이런 문장이 있었다.


잭 케니슨은 강을 바라보았다."걷는 중이었어요. 벤치를 보니까 피로가 몰려오더군요. 요즈 잠을 못 자요. 그래서 앉았는데 어지러운 거예요. 머리를 다리 사이에 기댔는데, 그다음에 보니 내가 바닥에 누워 있고 웬 여자가 나한테 꽥꽥대는 거요. '당신 죽었소?'하고."

올리브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명 죽은 건 아니군."


앨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문장들도 좋지만 드라마로 만들면서 개작한 촌철살인의 대사들도 좋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드라마 명대사들을 모으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잘 쓴 드라마 대사들은 언제나 나를 힘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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