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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 한 알이 만든 스토리텔링

이상국의 「자두」

by 편성준

아침에 글쓰기 수업 준비를 하느라 에버노트를 뒤적이다가 예전에 스크랩해놓은 시를 하나 발견했다. 이상국의 「자두」라는 시다. 전에 읽었는데 다시 읽어도 가슴이 찡하고 슬며시 웃음도 나온다. 좋은 글이란 이런 게 아닌가. 스토리도 있고 웃음과 감동도 있고. 박준 시인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시도 그렇다. 재밌는 것이든 부끄러운 것이든 자신의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자랑하는 것, 그게 시인들의 일이고 스토리텔링 잘하는 사람들의 비결이다.




자두

이상국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

어머니는 밭 매러 가고

형들도 모르는 척

해가 지면 저희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몰래 울 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먹었다

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낮엔 굶고 밤으로는 자두로 배를 채웠다


내 딴엔 세상에 나와 처음 벌인 사투였는데

어느 날 밤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빈속에 그렇게 날것만 먹으면 탈난다고

몰래 누룽지를 넣어주던 날

나는 스스로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자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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