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온라인 프로모션 팀에 막내가 배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지경은 자신이 세상을 돌려놔서 기특해서 하늘이 주는 선물이라고 확신했다. 천만다행인 것은 늦게 되돌렸더라면 3년 동안 기다려온 막내에게 처음부터 반말을 듣는 신세가 될 뻔했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행운이 이지경의 옆에 있음이 분명했다.
막내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취업을 한 24살의 강심지였다. 공모전에서 수상을 여러 번 한 경력이 있다고 아이디어가 풍부한 A급 인재라고 정곤대 부장은 그녀를 치켜세우며 소개했다. 나하나는 이번에는 개념 없이 중고 신입이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실 누가 봐도 강심지는 대학생처럼 생기발랄하고 젊음이 넘쳐 보였다.
“지경 씨, 처음 생긴 후배니까 옆에서 자리 세팅하는 거 많이 도와줘. 회사생활 꿀팁도 알려주고!”
지경은 막내가 생겼다는 사실에 신나게 도와주었다. 신입이 궁금해하는 것은 인사팀에 적극적으로 문의해서 알아봐 주고 여러 가지 일할 때 필요한 시스템들도 컴퓨터에 미리 설치를 해줬다. 강심지는 과하게 감사 인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고맙다고 말하는 말투에는 진심이 느껴졌다. 이지경보다 나이가 어려서 후배로 대하기도 불편하지 않았다고 그렇다고 뻣뻣하지도 않으니 무난하게 함께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지경은 기분이 좋아졌다.
가을날, 사무실 창문으로 햇볕이 길게 내리쬐고 다들 이번 주의 사태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신 하품을 했다. 정곤대 부장은 신입도 왔으니 요 앞에 새로 생긴 카페에서 커피와 간식을 사서 먹자고 말을 꺼냈다. 회의비를 쓰는 것인데 마치 자신이 쏘는 것처럼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정곤대 부장이 말을 던졌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하나 대리는 당연히 지경과 신입이 사 올 것으로 생각했다. 나하나 대리는 누구를 지칭하지도 않고 ‘나는 아아!’라고 외치고 거래처에 전화를 걸었다. 이지경은 신입의 첫날이니 강심지한테 막내의 역할을 솔선수범해서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6명의 메뉴를 포스트잇에 적어왔다. 그리고 회사 업무 사이트를 탐색하는 강심지에게로 향했다.
“심지 씨는 커피 뭐 마실 거예요? 같이 사러 가요.”
“아, 저는 커피 안 마셔요. 다녀오세요.”
강심지가 너무도 해맑게 대답해서 이지경은 하마터면 ‘네’라고 대답하고 혼자 또 카페를 갈 뻔했다. 이지경은 순간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디저트까지 사 와야 해서 손이 모자랄 것 같아서 같이 가요."
“아 그래요? 그럼 도와드려야죠.”
강심지는 선심을 쓰듯이 이지경을 도와준다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졌다. 이지경은 뭔가 자신이 상상하던 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나가는 길에 팀원들의 캐릭터도 소개해주고 막내의 고충을 알려주기로 했다.
“가끔 나하나 대리가 아침에 커피를 부탁할 거예요. 당황하지 말아요.”
“거절하면 안 되나요?”
“거절? 흠… 글쎄요. 그럴 분위기는 아니긴 한데….”
이지경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할 말을 잃었다.
“아, 제가 알아서 할게요.”
강심지는 쿨하게 대답을 하고 아무 말 없이 커피숍으로 향했다. 단둘이 있었지만, 대화는 잘 이뤄지지 않았다. 강심지는 사실 회사에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철저한 개인주의를 지향했기 때문에 자신이 맡은 일을 120% 해내고 남은 시간은 개인적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그렇게 둘은 어색하게 커피와 디저트를 사 왔고 강심지는 정말 한 입도 먹지 않았다. 이지경은 친구들이 털어놓았던 막내에 대한 고충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다음 날, 이제 나하나는 호칭을 생략하고 사람들이 모이면 누구에게 시키는지 모르게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
“부장님은 아메리카노 맞으시죠? 전 오늘 바닐라라떼요.”
그렇게 말하고 꼼짝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했다. 이지경은 오늘은 그것이 자신의 임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침묵 속에서 버티기 힘들었지만, 눈을 질끈 감고 ‘이제 내일이 아니야. 제발 가만히 있어 이지경.’ 자신에게 주문을 걸고 있었다.
막내는 다리를 꼬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커피 오더만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아무런 미동이 없자, 나하나 대리는 막내를 부르지 않고 이지경을 불렀다.
“지경 씨, 못 들었어?”
이지경은 막내를 쳐다봤지만, 자세히 보니 콩나물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크게 듣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얼음처럼 움직이지 않던 몸을 땡! 하여 움직여야 했다.
“아, 제가요?”
이 말조차 이지경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다. 나하나 대리는 그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이 이지경을 똑바로 바라봤다.
“에이 자기, 왜 그래? 자기 담당이잖아.”
이지경은 담당이라는 말에 그동안 희생과 인내를 무릎 쓰고 해왔던 자신의 호의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희생하는 마음으로 커피를 사 왔던 것인데 나하나는 이지경을 ‘담당자’라고 부르면서 당연히 그 일을 시켜 왔던 것이다. 나하나가 일말의 미안함은 느끼지 않는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것이 이지경을 담당자로 여겨서 인줄은 몰랐다.
“담당이요? 대리님. 커피 담당이 어디 있어요. 업무도 아니고. 그냥 제가 그동안 호의로 사다 드린 거죠.”
처음으로 이지경은 반항 비슷한 것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친절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나하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처음 받아보는 대답에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유연한 싸가지였다. 바로 방향을 바꾸어 강심지에 말을 걸었다. 나하나 대리는 아직 강심지의 캐릭터를 파악하지 못했던 터였다. 이지경은 흥미롭게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아 그래? 맞아. 그럼 이제 강심지가 해주면 되겠네. 심지씨?”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지경은 하마터면 키득 하고 웃을 뻔했다. 머리카락에 귀가 가려서 이어폰을 끼고 있는 것이 뒤에서 보이지 않았다. 나하나는 데시벨을 올려서 강심지를 불렀다.
“강심지씨!!!”
그제야 소리를 듣고 강심지는 평온한 얼굴로 돌아봤다.
“네?”
“커피 좀 사다 줘. 원래 온라인 프로모션팀 막내들이 해왔던 일이야. 부탁해. 부장님은 아메리카노 좋아하고 나는 바닐라 라떼.”
“아, 제가 커피를 마시지 않아서요.”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서 이어폰을 끼려고 하고 있었다. 나하나 대리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한마디 거들지 못했다. 신입의 아우라가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사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진정해 차장이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이제부터 커피는 각자 사다 먹도록 해요. 그리고 탕비실에도 커피 믹스 있으니까. 그동안 이지경씨가 너무 고생하긴 했어.”
나하나 대리는 똥 씹은 표정으로 탕비실에 커피를 가지러 갔다. 이지경은 통쾌함과 억울함을 동시에 느꼈다. 이렇게 한마디면 됐는데 그동안 미련스럽게 참았다니 말이다.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오전 업무를 했다.
점심시간에는 다른 팀원들이 외근이 있는 관계로 막내 강심지와 이지경은 단둘이 밥을 먹게 되었다. 역시나 강심지는 말이 없었다. 사람들과 있을 때 대화의 공백이 어색해서 못 견디는 이지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지경은 공백을 채우기 위해 쓸데없는 말을 할 때도 있었고, 괜히 마음에도 없는 칭찬이나 자신을 깎아내릴 때가 있었다. 강심지는 전혀 공백을 신경 쓰지 않았다. 공백을 못 견디는 이지경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지경은 나름대로 호의를 가지고 강심지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오늘 나하나 대리를 향한 반격에 대한 고마움도 마음 깊은 곳에는 존재했다. 자신은 나하나 대리와는 다르게 좋은 선배가 되고 싶었다.
“심지 씨. 그래도 한국 사회에서 조직 생활 잘하려면 막내 역할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나도 3년 동안 짜증 나는 상황 많았는데 그래도 언젠가는 또 후배들도 들어오고 하니까 또 지나갈 거예요.”
“선배님, 꼰대에스티? (꼰대 st)?”
이지경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가 자신에게 날라 들어와서 말문이 막혔다. 이지경이 눈만 동그랗게 뜰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꼰대 기질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꼰대 스타일이라고 대놓고 묻다니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자신은 누구보다 공평하고 권위 의식이 없다고 느꼈었는데 어느새 자신이 해왔던 허드렛일을 암묵적으로 강심지가 해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지경은 ‘꼰대’라는 단어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굴이 울긋불긋 하는 것을 알아봤는지 강심지는 웃으면서 농담이라고 말했다.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