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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13. 2021

나를 끄고, 너를 켜봐

네모난 몸 네모난 하나의 눈, TV의 말

*사물의 입장에서 쓴 글.

        

   오늘도 나는 종일 텅빔을 보았어. 내 친구들은 역이나 터미널 대합실에서 종일 출발 시간을 기다리거나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병원 대기실이나 병실의 여러 사람들을 묵묵히 보기도 하고, 혼자 계시는 노인 분들 말동무가 되어 드리기도 하고, 작은 방에서 대충 차려 한 끼를 해결하는 너나들의 작은 습관들을 보기도 하고 뭐 그러고들 있지. 사람들은 나를 아주 좋아해. 잔소리 안 하거든. 온갖 버라이어티한 것들을 보여주거든. 웃기고 울리고 심각한 포즈를 취하게도 하고 아무튼 세상의 희노애락들을 딱 딱 딱 재단해서 착 착 착 보여주고 있거든. 사람들을 그토록 쉽게 환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할 수 있는 능력자들이지. 


  내가 보는 건 그들의 텅빔이야. 사람들은 자기들이 나를 보고 있다 생각하지. 실은 내가 그들은 보고 있는데도 말야. 많은 이들이 나를 좋아해 주고 있지만 내가 떡하니 있는 데도 불구하고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들도 많아. 내가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바로 그런 부류들이지. 그들은 다른 무언가를 하거든. 나를 입 다물게 하면 나는 캄캄해지지. 그런 나를 시간을 두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너는, 심연으로 가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몰라. 나는 너의 공간을 비추고 너를 비추지. 그러면 너는 비로소 가상과 실제가 모호해지는 세계를 만나게 돼. 실재(實在)한다고 믿는 세계에 의문을 가지게 되는 거지. 


  ‘내가 심연을 계속 들여다 보면 어느 새 심연도 나를 들여다 본다’(니체)고 하잖아. 나를 입 닫게 하고 나를 계속 응시해 봐. 흠. 이상한 형태의 면벽수행이 되겠구나. 나를 종일 바라봐 주고 좋아해주는 사람들은 내 겉만 보고 있지. 실은 그게 내가 해야 하는 중요한 임무이지만 그냥 지긋지긋 해. 너도 사람들이 너의 진정한 모습을 몰라준다고 섭섭해 하거나 신경질을 내기도 하지. 그러는 너는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착각하지마. 우리가 만나는 건 각자의 브라운관에 보여지는 일부일 뿐이야. 그걸 히라노 게이치로 라는 일본 작가가 ‘분인(分人)’이라는 개념으로 아주 똑 떨어지게 정리해 두었더라.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모습 중 상대에 따라 발현되는 모습은 각각이 다 다른 데 그 각각 다른 모습 하나하나를 분인이라고 하는 거지. 그건 페르소나(persona)와는 다른 개념인데, 우리 각자는 내 여러 분인 중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 가장 잘 발현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살아감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 것 같아. 생(生)이 이렇게나 한 순간인데 내 좋지 않은 분인을 자꾸 끄집어 내게 하는 이들은 웬만하면 마주치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게 참 쉽지 않지? 


  나도 의미 없이 떠들어 대는 내가 싫지만 그게 또 해야할 일이고, 내가 없으면 심심할 많은 이들을 생각하면 좀 더 분발(?)해야 겠다는 생각도 들어. 그렇지만 우리 각자 꺼놓는 시간을 자주 마련하자. 진짜 ‘나’가 켜질 수 있도록.               

     

* ‘분인(分人)’에 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히라노 게이치로 『나란 무엇인가』 추천 드립니다.    


      

2016. 6. 6



* 써두었던 글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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