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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13. 2021

기다리니까 사람이다

핸드폰의 말

 * 사물의 입장에서 쓴 글


     

   너도 전화를 기다리는 모양이구나. 오지 않는 전화를. 주말이나 휴가 때, 방해받고 싶지 않은 여러 순간들. 그럴 땐 일부러 날 피하기도 하더니 지금은 무엇을 기다리느라 그렇게 하염 없니. 새벽에 자다깨어 잠깐 켜 보고 돌아 누워, 또 그렇게 아침이 밝을 때까지 절벽이 되곤 하는 네 마음을 생각하면 아득해지기만 해. 간절함이 실망으로 또다시 체념으로 내려 앉는 동안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나는 또 괜히 미안하고, 그래. 


  스팸 전화, 고객니임 하는 전화, 각종 광고 메시지들도 꼭 그럴 때만 기다렸던 것처럼 들이닥쳐서 사람을 깜짝깜짝 놀래키곤 하지. 너 그러는 거 보고 있으면 내가 다 안쓰러워서 눈 둘 데가 없더구나. 아무 소식도 들려줄 수 없는 나도 답답하긴 매 한 가지. 너는 종종 까닭없이 외로워지기도 해서 아무에게라도 전화를 걸어보고 싶지만 막상 전화번호부를 뒤적여 보면 이유 없이 불러낼 수 있는 사람도 딱히 없어서 더 공허함을 느끼곤 하지. 나는 때마다 업그레이드 되어 최신의 짱짱함을 갖추고 심심할 틈을 주지 않으려 애쓰는데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 던져 버린 장난감처럼 이후의 무료함을 상쇄시켜 주기엔 잠깐의 기쁨이란 것도 참 비루하다 싶어. 사람들이 소통 소통 하는 데 이렇게 지천에 널린 소통 수단만큼이나 단절감도 증식한다는 게 흥미롭지. 


  내가 카메라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게 그나마의 자랑 거리. 일상의 크고 작은 순간들을 사진으로 기록해 둘 수 있다는 건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근사한 일이지. 하지만 시도때도 없이 나를 꺼내 ‘들이대’는 건 좀 자제해 줄 순 없을까? 원치 않는 상대에게 직선의 방향으로 셔터를 누르지는 말자. 옆모습이나 뒷모습 또는 어떤 풍경의 배경이 되어 주는 상태를 건네 주는 것만으로도 관심이나 애정의 표현으론 충분한 것 같아. 때때로 그런 것이 상대에겐 소소한 기쁨이 되기도 하겠지. 지금 재생되고 있는 너의 음악도 궁금하구나. 최근 재생 목록은 네가 얼마나 들었는지 나도 다 외울 정도. 그러고 보면, 너는 나에게 모든 것을 들켜버리는구나. 


  너의 SNS, 네가 찍은 사진들, 네가 저장한 이미지들, 너의 재생 목록들, 자주 애용하는 서점 앱에서 네가 주문한 책의 목록들, 네가 자주 사용하는 앱들...나만 들여다보면 네 취향의 거의 모든 게 말갛게 드러날 수도 있을 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비밀번호를 걸어두나봐. 개인 정보 노출을 꺼리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각자가 지키고 싶은 고유의 내밀한 공간이 있는 법이니까. 이렇게 별 시답잖은 얘기들을 주절거리고 있는 데도 여전히 네 촉수는 기다림의 방향으로만 싱싱하구나. 그래. 生은... 기다림 말고 아무 것도 아닐 지도 몰라. 그게 전부일지도 모르지. 네가 어떤 전화를 기다리든 나도 함께 기다려 줄게. 기다리는 전화는 끝내 오지 않을 지도 몰라. 주저 앉아 울어도 돼. 그러는 네가, 나는 영영 아름답다.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정호승, 「수선화에게」 중에서)          



2016. 9. 1



* 써두었던 글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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