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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13. 2021

비가 오면 또 어때

저 구석에서 우산이 하는 말

* 사물의 입장에서 쓴 글



  햇볕이 짱짱해. 그런 날 팽팽하게 펼쳐주어서 고마워. 늘 비를 맞아야 하는 내가 잠시 양지로 나오는 시기이기도 해서 나는 여름이 좋단다. 해가 심하다 싶을 만큼 내리꽂히는 날엔 양산을 대신하여 내가 사방으로 펼쳐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가 빛나는 날은 비오는 날이지. 기상청 일기 예보 반대로만 하면 되던 장마가 지났구나. 일상에서 챙겨야 하는 몇몇 물건들 중에서도 나는 애물단지 상위 등급이지. 어려서부터 너는 아마 나를 자주 잃어버려 엄마 잔소리를 많이 들어야 했을 거야. 하긴, 형제들이 하나씩 잃어버리고만 와도 다시 사려면 돈이 얼마야. 


  학교에 두고 왔는데 다음 날 제자리에 있으면 다행인거고, 버스에 두고 내리기는 기본, 편의점에서 라면 먹을 때 옆에 걸쳐놨던 나를 그대로 두고 나오거나, 벤치에 잠깐 앉았다가는 정신머리랑 함께 두고 일어서고 말야. 아이고 그 분실의 역사를 어찌 다 말해. 거리에 떠도는 우산 신세가 되고 나면 다른 사람의 ‘득템’이 되기도 하고 이리저리 채이다가 뒤집어지고 휘어지고 꺾이고 결국엔 어디 구석에 처박히는 걸로 내 수명은 끝나는 거지. 근데 말야, 이건 참 민망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나는 내 힘이 닿는 한 네 옆에서 일당백을 하고 싶었단다. 


  비 오는 날 네가 날 펼치고 걸으면서 목을 놓고 울 때 내가 사방으로 어떻게든 팽팽하게 활짝 펼쳐 비를 피하게 해주려던 거, 너 모르지? 작은 우산 하나로 어깨 한 쪽 씩이 젖어도 그렇게 좋았을 사람이 어느 날 폭우가 되었을 때, 너는 그렇게 큰 우산을 혼자 쓰고도 안팎이 다 젖어 마른 구석이 하나 없더구나. 같이 있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나는 다만 나의 최대한이 되려 애써 보기는 했단다. 


  살면서 누구나 비를 맞아야 하는 시기가 있잖니. 가랑비든, 소나기든, 장맛비든, 때로 여우비든. 내가 무용지물일 정도로 큰 태풍의 시기가 오면, 그냥 접어도 돼. 접고, 함께 걷자. 태풍이 성질 부리고, 다 뒤집어 엎고 지나갈 때까지 손 꼭 붙들고 함께 있자. 살다보면 때론 몸을 숙이고 큰 비바람을 견뎌야 할 때도 법이니까. 잦아들면, 좀 잦아지면, 그 때 나를 펼쳐줘. 다 막아줄게. 다 가려줄게. 나는 말야, 


  웃긴 상상일지도 모르겠는데 우산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따로 있을 것 같아. 장우산, 2단 우산, 3단 우산 등등 각종 잃어버린 우산들, 찢어진 우산, 부러진 우산, 녹슨 우산 등등 기능을 하지 못해서 버려진, 그런 우산들만 모여서 사는 나라들 말야. 지나간 시간, 인연, 사랑, 슬픔과 기쁨, 마음을 오고 가는 온갖 감정들도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내 어딘가에서 자기들끼리 나라를 이루고 있을 것처럼 느껴지듯이 말야. 


  8월. 더워. 몸이 쩍쩍 붙어서 인간의 몸으로 벨크로가 되는 기적의 달이지. 이럴 땐 슬픔도 괴로움도 지칠 수 있는 시기이니, 우린 그 틈새에서 더위를 피하자. 일어설 때 또 정신머리랑 함께 나를 두고 가도 어깨 늘어뜨리지 않을게. 각자의 나라에서 우리 부디 맑고 보송보송한 것만을 생각하도록 하자. 지금도 잘하고 있는 너를 응원해.     


2016. 7. 31



*써두었던 글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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