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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끼 Oct 20. 2022

또 다른 구조로 이어지는 삶

콩심이와 아부지

어느 날 JY에게 연락이 왔다.


‘야, 너 지금 시간 되니? 나랑 울산 가자.’

지도를 켜 울산유기동물보호센터까지 소요시간을 찾았다.

왕복 11시간. ‘그래, 가자.’


20년 지기 친구인 JY은 몇 년 전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 나와 최근 새 식구를 들이려고 물색 중이었다. 이왕이면 분양보다는 유기동물 센터에서 입양하길 바랐던 그녀는 유기견을 데려온 경력이 있는 나에게 연락 했다. 생각보다 1인 가구 여성이 유기동물을 데려오는 것은 쉽지 않았고, 서너 번의 고사 끝에 상황과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은 것이다. 서울에도, 경기도에도, 하다못해 충청도에도 유기견은 넘쳐다는데 어쩌다 보니 서울에서 5시간 반이나 걸리는 울산에서 녀석을 찾았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울산행 기차를 탔고 어쩌다 보니 또 다른 생명을 구하러 간다. 물론 JY이 콩심을 구했지만, 결국 끝에 다다라 섰을 땐 콩심이 JY을 뒤흔들고 구원하리라 조심스레 예상하며, 내가 받았던 무조건적인 사랑과 애정, 그것이 숫자 속의 JY을 좀 더 따뜻하게 덥혀놓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움직인다.

차 뒷자리에 유기견 센터의 진득한 꼬랑내가 진동하는 검은 개를 싣고 살아생전 처음 달려보는 동해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피곤과 허기짐이 뒤엉킨 낯선 시간을 가로지르는데 마음 한 구석이 괜스레 벅차오른다. 초행길이라 내비게이션에 온 집중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형언할 수 없는 웃음과 환희가 비실비실 새어 나온다. 우선 움직여 보는 일, 옳고 가치로운 일에 셈 없이 덤벼보는 것에서 온 환희다.

안녕 콩심아


또 어떤 날은 아버지에게 연락을 드렸다. 투박하고 자식에게 무심하고 막무가내 같은 아버지. 전형적인 베이비 부머 시대의 가부장적인 아버지. 거친 세상에서 스스로를 방패 삼아 처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자신은 잠시 뒤로 미뤄둔, 덕분에 자식과 다소 서먹서먹한.

‘아빠, 우리 다음 주에 성인봉 가자.’

퇴사한 동생과 여행을 계획하다 울릉도에 가보고 싶다던 아빠의 지나간 말이 어렴풋 기억났다. 친구 누구누구는 울릉도에 갔는데 드디어 이번 기회에 가보겠다고 신나 하시던 아빠는 아픈 노모와 이를 간병하는 엄마를 두고 어떻게 여행을 가냐며 결국 출발 전 날 갑작스레 여행을 취소했다. 순식간에 많은 게 틀어졌고 평소처럼 동생과 ‘아빠는 도대체 왜 그럴까?’를 시작으로 서로 한탄을 하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푸코가 열어준 통로를 단단히 만들어내는 건 나의 몫임을 알기에 다시 그에게 전화했다. 아빠의 변덕이라기보다 자신의 엄마와 부인에 대한 아빠만의 애정에서 비롯된 갈등. ‘싫음 말고.’라는 평소의 나를 버리고, 엄마 혼자 고생하지 않게 이런저런 장치들을 해놓을 테니 가자며 아빠를 설득했다. (그 장치는 용돈이었다.)


해발 998m의 성인봉. 수요일 오전의 울릉도 산자락은 한산했고, 운무가 살짝 내려앉아 원시림으로 가득한 등산길은 더욱 초현실적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장면. 한평생 가족들을 뒷자리에 태우고 세상을 돌아다녔던 아버지는 자식들이 다 커 운전할 필요가 없다며 30년 만에 처음 차 뒷자리에서 푸르고 깊은 동해 바다의 일렁임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세상으로부터의 방패가 되는 바람에 딱딱히 굳은 어깨가 잠시나마 긴장을 놓는다. 가족들을 위해 잘라내 왔던 감응의 더듬이들이 아빠에게도 다시 돋아나는 순간이다.


울릉도 항구에서 아빠의 이면


서로가 서로를 구조하고 연결되어 좋은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원동력. 그것은 나를 평생 괴롭힌 공허함을 사이사이를 메꿔주었다.


푸코와 두부를 만나기 전, 사유 없이 ‘왜 살아야 하는가?’의 질문에 대한 한 가지 정답만을 갈구하며 삶을 늘어트려 놓았다. 주말이 되고 휴일이면 가까스로 얻은 자유의 시간을 소모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집 밖을 나가 소비하곤 했다. 서점엔 뭐든 할 수 있다는 소중한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일회용 반창고 같은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절망이 없는 sns 속 진열대의 많은 이들은 행복했다. 그렇게 어떤 희미한 회색 점으로 점차 매몰되가던 인생의 중간쯤 가깝고 먼 죽음들을 목격하고, 퀘스트 같은 삶의 허무함에 염증을 느끼던 시점 두 털 뭉치들을 만나 비효율적으로 살아보리라 다짐했다. 조건 없이 누군가를 보듬고 사랑해보자고. 녀석들은 나의 오래된 관성을 흔들고, 아집으로 뭉쳐진 견고한 지형에서 나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인생그래프에 불현듯 등장한 푸코와 두부는 압축된 생의 시간만큼 매 순간에 충실하고 자신들의 시간으로 살아가며 타인의 시간에 함몰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지지와 애정을 모지리 같은 반려인에게 보낸다. 지금 우리가 같이 있음에 감사하고 찰나들을 사랑하라고.


글과 이미지를 정리하고 있는데 마침 발 밑에 푸코가 있다. 문득 푸코에게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합리성과 효율로 범벅된 일상 속, 거의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 그나마 하나 확실한 건 발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푸코의 부드러운 등 털의 촉감. 때로는 보이지 않고 확실치 않은 것들을 만져보겠다고 허공을 향해 발버둥 쳤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가장 먼저 내 손에 잡힌 건 녀석의 뭉클한 턱 살이다. 푸코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푸코와 두부가 머문 뜨뜻한 자리, 거칠한 발바닥의 촉감을 통해 존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공허한 매일이 가득 채워진다. 


나는 매몰되지 않은 좀 더 옳고 따뜻한 곳으로 우리의 삶을 구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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