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로빈이 숙박비를 떼 먹은 이유는

로빈7

by 위키별출신

“로빈, 나야, 너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전화 건너편의 상대방은 답이 없었다. 묵묵부답이기에 뭘 생각하기에 이렇게 긴 침묵을 하는 건가 의아했다. 그렇게 몇 초 더 지난 다음에 나온 음성은 로빈의 것이 아니었다.


“안녕, 난 모리스라고 해. 음, 로빈 찾는 거야? 로빈은 지금 전화 받을 수가 없어. 무슨 일인지 알려주면 내가 전할게.”


숙박비를 내지 않아서 호스텔 관리자가 널 고소하려고 한다라는 소식을 본인이 아닌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주저되었다. 나는 그 대신, 그에게 직접 얼굴을 보고 물어봐야 할 게 있어서 꼭 본인과 통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리스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으며, 나의 이 같은 제안을 환영했다.


“아, 네가 그 피아노 치는 애니? 웰컴이야. 나도 음악해. 포지션은 베이스야. 안 그래도 너 만나보고 싶었어. 로빈은 우리 집에 있으니, 당장이라도 와. 주소 알려줄게.”


“아니, 당장 갈 생각은 없는데.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가려고 했지.”


“무슨 소리? 우리 뮤지션들은 다 올빼미 아니니? 너 밤에 깨어있지? 나도 그래. 우리 모두 그렇잖아, 사양하지 마. 오면 맛있는 거 줄테니까 먹고 함께 연습하고 놀자.”


“….”


나는 분명 급박하고 껄끄러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던 것 같은데, 전화를 받은 남자의 목소리는 너무 친절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가 알려준 주소는 구글맵으로 찍어보니 30분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반은 미쳐서 날뛰는 호스텔 관리자와 가면 맛있는 걸 해준다는, 전화상으로는 따뜻해 보이는 장소 사이의 선택은 어쩔 수 없이 쉬웠다. 잠깐 생각해보고 가 보기로 결정했다.


서양인들은 자기 집에 놀러온다고 해서 그것을 성적인 접촉의 허락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99% 안전할 것을 알고 있었다. 모리스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로빈도 있으니까 별다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보험으로 누구 하나를 데려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호스텔에 머무는 사람들 중 몰리라는, 삐쩍 마르고 눈이 커다랗고 탐스러운 머리칼을 가진 여자를 꼬셨다. 지금 저렇게 날뛰는 니노가 있는 호스텔에서는 도저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없지 않느냐, 나와 같이 잠깐 새로운 모험을 떠나자는 식으로 말이다. 그녀는 흔쾌히 허락했다.




나는 모리스의 집을 몰리와 함께 어렵게 찾았다. 녀석이 잘못된 주소를 알려줬기 때문이다. 그가 마중을 나와서 간신히 들어가게 된 곳은 대로변에서 약간 외진 곳에 있는 2층 집이었다. 초입부터 심상치 않았다. 입구 앞에 우드스탁을 기념하는 포스터가 여럿 달려 있고, 내부에는 짐 모리슨과 제니스 조플린과 유리스믹스와 매릴린 맨슨 등의 사진과 기념품들이 어지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모리스는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수염, 그리고 녹색 눈동자가 돋보이는 남자로 기껏해야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그는 다른 여자를 추가로 데리고 나타난 나에게 불평도 하지 않고, 찾아오느라 힘들었겠다면서 우리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내부는 방이 다섯 개였고, 일반 가정집 같지 않게 천장이 넓었으며 각각의 방은 나무문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그는 그 중에서 가장 큰 방으로 우리를 데려간 뒤 차를 끓이러 갔다. 연습실로 쓰는 방인지 왼쪽 벽면에는 기타가 다섯 점 정도, 오른쪽의 일인 용 침대 위에는 베이스가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었으며 스피커를 손보던 모양이었는지 연장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외에도 오디오 인터페이스라던가 캐논과 xlr 케이블 같은게 쓸데없이 긴 줄을 자랑하며 늘어서 있다.



암만 봐도 곡 작업을 하는 현장이다. 그런데 차음도 흡음도 안 되어 있는 이런 환경에서 중요한 보컬 녹음을 어떻게 할 생각일까? 방문 맞은편에는 벽난로가 세워져 있었으며 그 앞 테이블 위에 아슬아슬할 정도로 걸쳐져 있는 상자가 보였다. 겉면은 벨벳으로 싸여있어 뭔가 중요한 장비인 게 틀림없었고, 예감이 맞았다. 상자 안에는 스펀지에 곱게 싸인 콘덴서 마이크가 있었다. 곧바로 부엌에 올렸던 주전자물의 불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남의 물건을 뒤지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빼꼼히 열었던 마이크 상자를 도로 닫았다.



“모리스, 미안한데 로빈은 어디에 있어? 전할 말이 있는데.”


“아, 저쪽 끝 방에 있어. 그런데 지금은 얘기하려고 해도 안 될거야. 약에 취한 상태거든.”


약에 취해? 마약 청정국가에서 자라 말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와 달리, 몰리는 한심하다는 듯 되물었다.


“뭐야, 마리화나야? 며칠 짼데?”


“글쎄…. 한 사오일 정도 됐을걸? 왜?”


“여기저기 다 문제로군.”


몰리는 한숨을 쉰 뒤 어깨에 메고 있던 푸른 색 양털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워물었다. 나는 여기저기라니 무슨 뜻이지, 라고 되물었다. 그녀는 니노도 아마 마약을 해서 저 모양이 됐을 거라고 말했다.


“저런 헛소리하고 피해망상으로 빠지는 거, 오래 마약한 애들 특성이야. 나도 그래서 마약 안 하잖아. 담배만 피우지.”


모리스는 로빈과 달리 마약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마 짐작컨데 로빈은 호스텔에서 마약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 지인의 집, 그것도 방이 여러 개 있으니 프라이버시도 보장되는 곳에 와서 실컷 약을 하고 쓰러져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가 숙박비를 내지 않은 것도, 여기서 약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되었다. 사용자들의 말로는 다우너 계열- 마리화나, 자낙스, 헤로인-같은 걸 사용하면 극도로 게을러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며, 그냥 집안에 쳐박혀서 며칠은 우습게 간다고 하니 말이다.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그리고 약을 사용하면 할수록 운동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나는 나와 버스킹을 할 때의 로빈의 매력적인 모습을 떠올렸다.


재능을 어떻게 사용하든 자기 몫이다. 제대로 사용하는 것도, 낭비하는 것도, 본인 마음이다. 남이 뭐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약을 하면 할 수록 그가 다른 사람들을 홀려 버리던, 기교와 감성이 넘치던 연주도 점차 녹슬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40.jpg M의 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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