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5
그의 손가락은 내가 맨 처음에 본 조지안 피아니스트 할아버지와 공통점이 있었다. 평소 그는 어딘가 느긋하고 여유만만한 분위기였는데, 기타만 잡으면 사람이 달라졌다. 지나치게 잘 친다. 정말 거슬릴 정도로.
내가 한국에서 버스킹을 할 때는 항상 자신감이 있었다. 보컬을 하면서 피아노를 치는 게 사실 좀 헷갈리는 일이기 때문에 연주 담당이 대부분을 하긴 하지만, 내가 보컬을 하지 않고 피아노만 치면 연주 담당보다 더 잘 할 자신마저 있었다. 그래서 연습할 때 상대의 실력에 끌려간다던가, 다음에 어떻게 칠지 신경쓰여서 못 견디겠다던가 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사람들은 연주자들보다는 보컬에 더 관심을 둔다. 비록 내가 말주변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피아노 연주자가 대부분의 문답을 소화하긴 했지만(그리고 이 사람이 센스가 있어서 사람들을 빵터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적어도 연주하는 동안에는 내가 뭘 하는 지를 관심있게 지켜보는 경우가 많았다.
<유리가면>이라는 만화가 있다. 미우치 스즈에가 1976년에 시작한 작품으로, 벌써 40년을 넘어 50년을 바라보고 있는 장기 미완 연재작이다. 일본 내에서만 5000만 부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아버지를 일찍 잃고 어머니는 중국집의 종업원이라는 가난의 클리쉐같은 뒷배경을 가진 주인공 기타지마 마야는 타고난 연기 재능으로 ‘무대광풍’의 별칭을 얻는, 일명 연기 천재다. 반면 그의 유일하면서도 최고의 라이벌인 히메가와 아유미는 주인공과 대조되게도 유명 여배우와 감독 사이에서 태어난 덕에 유전자는 물론 다양한 교육을 쉽게 받을 수 있다는 잇점이 많은 데다 노력까지 더해진 괴물이다.
두 사람의 대결은 엎치락 뒤치락하지만 둘 다 서로의 실력에 감탄하고 질투하고 무서워하면서 이어진다. 그 중
에서 인터넷 밈으로 유명한 게,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있는 백안의 아유미가 마야를 향해 독백하는 ‘무서운 아이…!’
아유미가 마야를 이기지 못한 분노와 괴로움으로 힘겨워하는 장면의 반복은 마야의 배역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지독한 광기와 함께 이 만화의 몰입력을 담당하는 중요한 요소다. 집안과 매력과 외모와 금전과 유명세와 이유 없이 자신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까지 안 가진 게 없는 아유미가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원하는 단 한 가지를 손에 넣지 못한다는 비극적인 설정은, 극에서 주인공과 대조되는 빌런 입장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유미를 동정하고 응원하게 만든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나는 이날 이때까지 아유미가 마야를 향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그와 똑같은 상황에 처해 본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아마추어로서 밴드 활동을 할 때도 만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내가 공연하는 앞뒤 밴드들은 번번히 우리 팀만 못했고, 우연히 구경한 공연도 대부분 그렇거나 아니면 아예 좀 유명한 프로였다. 구경하는 건 물론, 오디션을 보기 위해 우리 팀을 찾은 사람들 중에서도 기존 멤버를 압도할 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로빈은 내게 있어 ‘무서운 아이…!’였다. 레벨이 다르다.
나는 그와 한 시간 정도 공연한 다음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그건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몇 번 멤버가 들어왔다가 나간 뒤, 나와 피아노만 남았을 때의 일이다. 나는 단 둘이 공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피아노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즐기려고 하는 건데, 너랑 나랑 둘만 하는 것도 아쉽지 않니?”
피아노는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는데, 사람 보는 주관도 뚜렷하고 나보다는 눈썰미도 있고 해서 나는 그의 의견을 많이 수용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사람을 끌어오기도 잘했다. 그는 무슨 버스킹 협회에 나갔다가 우리와 비슷하게 보컬과 기타인 팀을 영입해서 콜라보를 하자고 했다. 나는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지금 잘 하고 있는데 왜? 더군다나 둘이 연습한 날들이 길어지다 보니 이제는 공연에서 박자나 가사 같은게 조금 틀리거나 틀어지더라도 서로 잘 메꾸게 되어가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파트너 생활을 한 경찰들 처럼.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다른 누군가를 영입하기를 바랐던 그는, 지금 생각하면 성격적으로는 외향성이 좀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아무튼 그가 보컬과 기타를 끌어와서, 우리 팀은 이제 보컬 두 명과 기타, 피아노로 얼추 구색을 맞추게 되었다. 여기에 상주멤버는 아니고 공연마다 퍼커션을 한 명 들이기로 했다. 서로 공연하는 곡도 그리 다르지 않아서 우리는 연습실에서 공연 리스트도 짜고, 끝나고 나서는 포장마차에서 반주도 하면서 친목도 다졌다.
그러나 문제는 공연한 직후였다. 뭐가 문제였는지, 공연 한 직후 뒤풀이에서 영입팀 보컬이 더 이상 콜라보는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유를 납득하기 힘들었다. 정말 음악적으로 안 맞거나 사람들이 싫거나 했으면, 공연하는 도중에 깨달았을 거고 그 때 언급을 했어도 됐다. 연습부터 공연까지 시간이 상당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동안에 우리는 안 맞는 것 같다던가 하면서 눈치를 준 적도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좀 더 빨리 만났으면 우리 팀에 부족한 부분도 보충하고 좋았을 것이라는 소리는, 술취했을 때 뿐 아니라 연습할 때도 종종 나왔었다.
그런데 왜?
그리고 나는 그들이 그때 ‘안 하겠다’고 했던 이유를 로빈과 공연하면서 알았다.
나는 이제까지 공연하면서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게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하는 연주자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 지에 대해서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따가울 정도로 나에게 꽂히는 시선을 처리하는 것에도 버거웠기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의 감정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것은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로빈과 버스킹 하기 전에 시간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보컬이 없는 상태로 공연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서술했듯 나는 기오르기와 파푸너와 일리야와 공연을 하고, 내 공연도 해야 했기 때문에 로빈과 공연을 위해서 가사를 외우고 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사를 보면서 하는 건, 암만 잘 불러도 사람들이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공연장이나 무대 위라면 보면대를 끌어와서 어떻게 안 보는 척 하면서 연주할 수 있도록 세팅을 하겠지만, 버스킹은 사람들과 눈높이가 같다. 무릎 위에 피아노를 올려 놓은 상태로 그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보면서 부르는 방법도 있지만, 폼도 안 나고 여러모로 불편하다. 고로 로빈과의 공연은 보컬 없이 악기만으로 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 둘의 실력차는 시원할 정도로 훤히 보이게 되었다. 분명 공연은 같이 하는데, 사람들의 뜨거운 찬사와 주목과 시선과 관심이 모두 극단적일 정도로 로빈에게만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