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현희 Jun 04. 2020

열무김치가 바닥으로 쏟아진 순간

하필이면 맛있게 익은 열무김치가 김치냉장고에 있었다.

텔레비전이며 SNS며, 아이를 키우지 않아도 육아 현장을 자주 볼 수 있는 시대다. 내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쁜 짓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저 즐겁다. 그 간접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 육아 프로그램과 아이 키우는 엄마들의 인스타그램을 즐겨 보곤 한다.


육아 콘텐츠를 보다 보면 꼭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마치 숨바꼭질 같은 식사 시간이다. 밥 먹기 싫어하는 아이가 식탁에 앉아 있지 못하고 온갖 곳을 돌아다니면, 아이 엄마는 밥그릇을 들고 아이만 쫓아다니며 어르고 달래 한 숟갈을 겨우 먹인다. 


얼마 전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가장 보통의 가족>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왔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두 프로그램 다 아동 심리 전문가인 오은영 선생님이 나와 즉각적인 피드백을 줬다는 것이다.


오은영 선생님은 아이의 엄마, 아빠에게 아이가 허기를 느끼지 않을 때 억지로 식사를 권하지 말라고 말했다. '굶어 봐야 배고픔을 안다'같은 폭력적인 대처가 아니다. 그냥 배고플 때 식사를 챙겨주라는, 아주 간단한 해결법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그 간단한 해결법이 전혀 필요 없었다. 아이들이 배고프지 않아 식사를 피한다고? 우리 집은 두 자매가 모두, 아니 특히 내가 깨어 있는 시간 내내 배고프다며 엄마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다. 간식을 찾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밥이다. 나는 제대로 된 밥상을 간식으로 치는 아이였다. 


열 살 무렵 가족사진. 같은 옷을 입은 아이 중 큰 쪽이 나, 작은 쪽이 연년생 동생인데 키 차이가 크다. ⓒ 이현희


자연히 어린 시절 우리 집의 식재료 소비량은 엄청났다. 한창 성장기였을 때는 쌀 20kg를 구매해도 4인 가족이 2주를 넘기지 못하고 먹어 치웠다. 함께 가게를 운영했던 엄마·아빠는 새벽에 퇴근한 후 24시간 운영하는 대형 마트에서 20만 원어치씩 장을 봤다. 냉장고와 창고에 초코파이·오렌지주스 같은 간식을 그득그득 채워놔도 일주일이면 먹을 게 없었다. 


고봉밥으로 두 그릇을 해치우고도, 돌아서면 배고픈 딸내미. 엄마는 "지금 찌는 살은 다 키로 가는 거야"란 마법의 주문을 외치며, 매 끼니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다가도, 한편으로는 너무 많이 먹는다고 생각했나 보다. 식사 시간 외에도 밥을 달라는 나의 외침에 혼내기 일쑤였다. 


식욕이 폭발하던 성장기의 와중에 늘 배고픈 나는 집에 혼자 남고 엄마가 잠깐 외출한 적이 있다. 냉장고에는 점심때 한 쌀밥이 남아 있었고, 하필이면 맛있게 익은 열무김치가 김치냉장고에 있었다. 


잘 익은 열무김치로 국수를 만들면 그 위력은 엄청나다. ⓒ 이현희


- '엄마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밥을 차려 먹고, 잽싸게 치우면 절대 모르겠지?'


그런 잔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게 화근이었다. 지금도 엄마는 비슷한 크기의 김치통을 쓰는데, 거대한 김치 냉장고에도 6통 정도밖에 못 들어가는 큰 김치통에 열무김치를 가득 채워놨다. 다 자란 내가 들어도 조금 무거운데 열 살도 안 된 애한텐 더 무거웠을 거다. 성장기의 허기가 끝끝내 귀찮음과 눈치를 이기는 순간, 나는 열무김치 통에 손을 댔고, 그대로 다 쏟았다.


정말 뭐 된 상황... 어떡해? 이걸 어떻게 치우지? 덜 자란 머리를 팽팽 굴리는데 닫혔던 현관문이 철커덕, 열렸다. 지갑을 두고 간 엄마였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엎어진 열무김치 통과 그걸 지켜보는 나. '배고파'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딸을 몇 년간 키워온 엄마는 단번에 상황을 인지했다. 그리고 실소를 터뜨렸다.


엄마가 나가기만 기다렸나보다고, 나의 무시무시한 식욕에 깔깔 웃으면서, 엄마는 그 많은 열무김치를 다 치워줬다. 미처 쏟아지지 않은 열무김치로 밥도 차려줬다. 얼마나 꿀맛이었는지 지금 이 브런치를 쓰면서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아니 열무김치 냄새로 가득 찬 집에 취한 걸지도.


엄마의 열무김치는 여름이면 만찬으로 변신한다. ⓒ 이현희


오은영 선생님의 '허기 솔루션'을 볼 때, 물론 엄마도 함께였다. 엄마는 "그래"를 남발하며 오은영 선생님의 리액션에 공감하다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 "근데 나는 우리 애들이 배 안 고픈 순간이 없었나 봐. 혼자 숟가락 잡을 힘 생긴 뒤로 뭘 먹여준 기억이 없어."


그렇다. 나는 숟가락 잡을 힘이 생긴 순간부터 내 안의 식욕을 마음껏 배출하고 살아온 것이다. 상상만 해도 입맛을 다시게 하는, 손맛 좋은 엄마의 딸이라 정말 다행이다.



- 더 자세한 엄마의 열무김치 레시피




01 열무를 깨끗이 씻은 후 소금에 1~2시간 정도 절인다.


02 충분히 절여지면 흐르는 물에 헹군 후 물기를 쫙 뺀다.


03 찹쌀을 물에 개어 찹쌀풀을 쑤어 둔다. 

*이때 찹쌀풀이 되직하면 일반 열무김치, 물처럼 멀겋게 끓이면 열무물김치가 된다.


04 물기를 뺀 열무에 다진 마늘, 고춧가루, 설탕, 까나리액젓을 적당량 넣고 버무린다.


05 통에 담기 전 큰애한테 하나 맛보라고 준다.






[이야기 끝]



- 깊은 공감이 일어난다면 작가 구독과 라이킷♥부탁드립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