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기쁨이 없는 삶은 잔혹했다.
그리고 나는 그 잔혹함을 허락하며 살고 있었다.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몫이 있듯,
나는 기쁨이 소거된 삶 또한 '어른의 정상적인 삶의 형태'라고 믿었다.
두 엄마가 되고 이제 조금 키우나 싶을 때쯤, 코로나가 찾아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던 시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수술까지 하게 되자,
내 몸은 회복보다는 '버티는 것'에 모든 기능을 집중했다.
내가 세운 육아의 기준은 무너진 지 오래고, 삶의 통제권은 내 손을 떠나 있었다.
그 시기 나는 불안을 유지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쓰고 있었다.
불안은 성실했다.
끊임없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게 했고, 기쁨에게 발붙일 틈 조차 주지 않았다.
기쁨을 일부러 밀어낸 것이 아니다.
불안이라는 거대한 가구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기에,
기쁨이라는 작은 의자 하나를 들여놓을 틈이 없었을 뿐이다.
그때 깨달았다.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불안을 관리하느라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 버린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흔히 이 팽팽한 긴장 상태를 '책임감'이나 '성숙'이라 부르지만,
실은 내 안에 감정을 돌볼 여력이 완전히 파산한 상태에 가까웠다.
나는 기쁨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라,
기쁨까지 책임질 힘이 없던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장난칠 때도 나는 그 안에 어울리지 못했다.
몸은 곁에 있지만 마음은 늘 한 발짝 물러서 감시자처럼 멀뚱히 서 있었다.
기쁨이 주는 느슨함이 혹시 모를 불안을 불러올까 봐.
나는 즐거움 앞에서조차 검문을 멈추지 못했다.
그렇게 불안이 삶의 기본값이 되는 동안, 기쁨은 사라진 언어가 되었다.
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데 모든 에너지를 쓰는 삶에서
내게 기쁨은 향유하는 감정이 아니라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사치였다.
그 시기 나는 잘 살아내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하루를 '통과하는' 사람이었다.
내일이 오길 바라면서도 오늘을 방어하느라 모든 힘을 써버렸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아주 작은 기쁨의 순간들을 검문하지 않기로 했다.
기쁨을 되찾겠다는 거창한 다짐이나 대단한 의미를 부여해 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 안에 불안이 극에 달할 때, 나직하게 말해줄 뿐이다.
"지금 이 기쁨이 와도 괜찮아. 나에게 허락해도 돼."
더 이상 기쁨을 불안의 침입자로 오해하지 않는다.
내가 여전히 살아있으며 오늘을 방어하는 것 이상의 삶을 살고 있다는 고마운 신호다.
이 글이 기쁨을 찾는 법을 알려주는 글이 아니라서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불안'이라는 성벽을 쌓느라
얼마나 많은 기쁨을 벽 너머에 세워두었는지 뒤늦게 알아차린 기록인 것이 위로가 되길.
만약 당신이 지금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당신의 마음이 메말라서가 아니라
나의 '불안'과도 같은 성벽을 쌓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에게는 기쁨을 찾아낼 의지보다,
기쁨이 머물러도 괜찮다는 '작은 허락'이 먼저 필요하다.
[이 편이 남기는 정리]
기쁨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마음이 메말라서가 아니라,
삶의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편이 남기는 질문]
나는 지금 기쁨을 거부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기쁨을 허락할 여력이 없는 상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