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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Mar 19. 2023

4000:1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동료

나의 동료, 나의 회사.

내가 그녀를 만난 건 바로 그녀의 첫 비행에서였다.


우리 항공사는 핀란드의 헬싱키뿐 아니라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베이스를 두고 있는데,

태국인인 그녀가 방콕 베이스 승무원으로 막 입사한 때였다.


키에서 출발한 우리 팀은 방콕에서 하룻밤을 고,

헬싱키로 돌아오는 비행 편에 새로 입사한 두 명의 태국 승무원이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첫 비행의 설렘을 너무도 잘 아는 우리 팀원들은 헬싱키를 출발할 때부터 새 동료들을 맞이할 생각에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은근히 들떠 있었던 것 같다.


더욱이, 코로나로 인해 폭망 하거나 휘청했던 업계 중 하나가 바로 항공사였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알이탈리아가 폐업을 하고 북유럽의 대형항공사인 스칸디아나비아 항공(SAS)이 5천여 명의 직원을 해고하는 등의 대란을 겪는 사이 우리 회사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러고 나서 맞는 첫 신입사원들이었다.


방콕에서 안 먹으면 억울한 망고.


방콕의 수완나품 공항에 먼저 도착한 우리 팀원들,

그리고 잠시 후 우리와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두 명의 태국인 신입 승무원이 나타났다.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둘의 한 손에는 빨대를 은 아이스커피가 한 잔씩 들려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면 첫 출근에 바짝 긴장해서 마시다만 커피를 들고 올 생각을 못할 텐데, 난 동남아인들 특유의 이런 여유를 부리는 모습이 참 좋다.

태국의 고급 호텔을 이용할 때 보면 직원들이 손님들에게 상당히 친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깍듯하거나 쫄지 않는다. 이런 편안한 사회 분위기가 끊임없이 외국인 관광객들을 오고 또 오게 하는 요인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 팀원들은 한 명씩 돌아가면서 신입 직원들에게 자신을 소개했고, 마지막으로 비행기에 오르기 전 사무장이 따뜻한 말투로 환영사를 건넸다.


"우리 회사에 온 걸 환영해요. 긴장하지 말고,

일은 우리가 할 테니 원한다면 구경만 해도 돼요."


방콕 노선은 직원들 사이에서 우리 회사 비행 중 가장 고된 비행으로 유명하다.

주 승객들은 태국으로 휴가를 가는 핀란드 및 북유럽인들. 추운 날씨와 술의 상관관계를 여실히 증명하는 북유럽인들의 여행이다 보니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술에 취해 있거나 비행 중 과다한 주류 섭취를 하는 승객들이 있어 직원들은 긴 비행 내내 이런 승객들을 끊임없이 상대하고 관찰해야 한다. 가족 혹은 단체 여행객들은 잠도 안 자고 파티를 이어가고, 이러다가 무려 열두 시간이나 되는 비행에서 의료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그 와중에 2백 명이 넘는 승객들의 안전과 기내 복리까지 챙겨야 하니 '방콕이 아무리 좋아도 방콕비행은 노(No)!'


이날 나와 비즈니스석에서 함께 일한 태국인 남자 승무원은 말이 신입이지 타 대형항공사에서 사무장까지 지낸 경력자였다.

진심이건 아니건 그의 미소는 수년을 거치며 얼굴에 아예 물들어 버린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음료와 식사를 나눠주며 승객들에게 건네는 농담 한마디 마디에 나도 몇 번 웃음이 터질 정도로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주변에 아군이 많이 모일 것 같은 그의 애티튜드는 내가 아무리 닮으려 해도 여간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기에, 같은 동료로서 함께 일하고 싶게 만드는 강력한 힘까지도 느껴졌다.


기본적인 기내 서비스가 끝이 나고 이코노미 석에서 일하던 여자 신입승무원이 기내 중간중간 다른 위치에서 일하는 승무원들을 찾아다니며 얼굴을 내비쳤다. 물론 우리는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며 그녀의 첫 비행 소감을 몹시나 궁금해했다.

경력이 탄탄한 남자 승무원과 달리 그녀는 승무원이 된 것도 이번이 처음, 우리 회사에 입사하기 전까지 유럽에 가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북유럽 항공사의 승무원이 되고자 결심했는지, 그전엔 뭘 하던 사람인지, 이제 막 첫 출근을 한 그녀보다 우리가 궁금한 게 어찌 더 많았다.


"4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거라고요"

그러던 중 그녀가 던진 한 마디.


어머~우리 회사가 그렇게 인기가 많다는 말이에요?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얼씨구나 받아쳐주던 우리가 진심으로 놀란 반응을 보인 건 이때였다.


취업문이 결코 넓지 않은 한국의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경쟁률이 몇 백대 일, 바늘구멍이라는 아나운서 시험의 경쟁률도 천 오백 대 일 정도라고 들었는데, 사 천대 일이라는 숫자가 가당키나 한가. 잠시 의구심이 들었지만, 생각해 보면 승무원의 높은 경쟁률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직업이 다양해지고 과거에 비해 해외여행이 자유로운 오늘날에도 승무원이라는 직업의 인기는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한 것이 사실이다. 그 인기는 아시아권만으로 국한되지도 않는다.


면도 사리도 원하는 대로 골라 먹는 태국 국수.


내가 처음으로 승무원에 지원한 것은 인구밀도가 적기로 유명한 호주에서도 특히 젊은 인구가 적기로 유명한 도시인 퍼스(Perth)에서였다.

내가 지원한 아랍 항공사는 당시 이력서(CV)를 직접 들고 면접장으로 찾아오는 공개채용 방식을 썼었는데, 그때 모인 지원자가 약 200여 명. 그중 면접 경험이 많은 (면접에서 떨어져 본 경험이 많은) 캐나다인 지원자 한 명이 이렇게 지원자 수가 적은 승무원 면접은 처음 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몇 달 전에 떨어진 캐나다 토론토인가 밴쿠버인가에서는 2천여 명의 지원자들이 몰렸었다고 했다.

결국 그 면접에서는 나를 포함해 약 열두 명 정도가 채용이 되었다. 지원자수에 비해 상당히 소수이긴 하지만 렇다고 해도 경쟁률로 치면 20대 1도 채 되지 않는다.


파리에 살면서 프랑스의 한 작은 항공사에 지원을 했을 때에는 이력서가 통과한 면접자들만 모인 적이 있는데, 약 30여 명. 그때에는 나를 포함하여 3명이 최종 선발 되었다. 이력서를 빼고 보면 경쟁률은 약 10대 1.


현재 회사는 면접 방식이 또 달라서 나와 같은 날짜, 같은 시간대에 면접을 본 지원자 외에는 본 적이 없어 그 수를 전혀 가늠할 수 없지만, 유럽의 한 항공사에서 일했던 입사 동기의 말로는 자기와 함께 지원한 전 직장 친구들은 모조리 불합격했다고 하니 어느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유럽이나 호주에서는 타 직종에 비해 월급이 높지도 않은 승무원이라는 직업이 인기인 이유는 아마도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아서이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해외여행이 아무리 자유로워졌다고는 하나, 대륙을 넘나드는 비행기 티켓 값은 여전히 비싸다. 웬만한 재력이나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승무원만큼 해외를 자주 다닐 수는 없다. 여기에 일반회사원 보다 많은 휴일 수, 가족들까지 누릴 수 있는 직원 할인 티켓. 이런 혜택에 반해 항공사가 지원자들에게 요구하는 조건들은 이력이나 경력면에서 의외로 단순하다.


아시아인들에게는 큰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신장 사이즈는 서양인들에겐 거뜬하며, 영어 실력도 아시아인들에 비해 우수한 편. 수영은 공교육과정에 습득한 경우가 많아 패스. 학력은 고졸 이상. 머리를 쥐어 짜야 따낼 수 있는 자격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외모든 성격이든 획일화된 기준이 아니라 다양성을 추구하는 서양사회에서는 그야말로 신체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 직업. (그렇다고 군대처럼 체력별로 등급이 매겨지는 것은 아님).

유럽이건 아시아건 입사 경쟁률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 직업의 인기는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4천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것은 대단하다.

입사 면접 테스트라는 것이 있어서 점수가 높은 순으로 뽑히는 것도 아니기에, 승무원 면접은 '운 빨'이 좋아야 한다는 말도 있는데, 4천 대 1이 보통의 운 빨로 될 일인가. 게다가 그녀는 승무원 경력도 전혀 없었다. 이런 사람이 내 동료라니, 그녀의 온화로운 겉모습 안에 경력보다 더 대단한 초능력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곧, 방콕 비행이 늘 그렇듯 커피 한 잔 다 마실 새도 없이 바빠졌고, 내게는 몇 가지 궁금증이 찌꺼기처럼 남았다.

그녀가 마주했던 높은 경쟁률만큼 회사와 일에 대한 기대치도 높을까,

(어차피 초능력자인 것 같은데) '이 일이 아니다 싶으면 다른 일 하지 뭐' 하는 가벼운 마음일까, 아니면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 뼈를 묻어야지' 하는 비장한 마음일까,

몇 만 명의 지원자들을 제치고 이 자리를 얻은 그녀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수준의 짜릿함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다행히 이번 방콕 비행은 입 승무원들에게 못 볼 꼴을 보이지 않고 무사히 끝이 났고,

비행이 끝난 후에도 두 신입 승무원의 얼굴에는 미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방콕에서 헬싱키까지 약 12시간. (러-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비행 경로)


나는 우리 회사에서 가장 강도 높은 일을 하는 승무원들이 방콕 베이스 승무원들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짧지 않은 이 비행은 연중 내내 만석이며, 기내를 꽉 채운 승객들 사이사이에는 알코올 중독이 의심되는 사람과 잠재적 환자 및 돌발 행동자가 지뢰처럼 박혀있다.

기존의 방콕 베이스 승무원들은 우리 회사에서만 적어도 십수 년을, 그것도 방콕-헬싱키 노선만 무한 반복하는 찐 베테랑들인데 그렇다고 해도 점점 나이가 들어가니 힘이 덜 들 리가 없다. 그런 이들에게 승객들과의 여유로운 농담이나 편안한 미소까지 기대한다는 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런 승무원이 있다면 분명 종교의 도움을 받아 득도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두 신입 승무원의 얼굴에 띈 미소가 더욱 가치 있고,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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