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요즘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스웨덴의 스톡홀름까지 비행기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
우리 회사의 모든 비행기는 원래 베이스인 헬싱키에서 출발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최근에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스톡홀름에서 출발하는 노선이 생겼고 바로 그 노선을 전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팀원들은 핀란드에 살기 때문에 비행이 있기 하루 전 날, 회사 비행기를 타고 헬싱키에서 스톡홀름으로 출근을 한다. 그리고 회사가 마련해 준 공항호텔에서 하룻밤을 잔 후, 다음날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스톡홀름 발 비행기에 승무원으로 탑승한다. 돌아올 때에는 스톡홀름에서 비행을 마친 후 가장 빠른 시간대에 있는 회사 비행기를 타고 헬싱키로 퇴근한다. (그렇다, 평소보다 두 배 더 피곤하다.) 좌석에 여유가 있을 때에는 회사에서 비즈니스 석을 끊어주지만, 승객들로 예약이 꽉 찬 경우에는 이코노미 석에 타야 한다. 한 시간밖에 되지 않는 비행이라 솔직히 아무 좌석이든 상관없다, 그저 집에 빨리 가고 싶을뿐이다.
스톡홀름 구시가지, 감라스탄.
열 시간이 조금 넘는 푸켓 비행을 마치고 늦은 저녁, 스톡홀름에서 헬싱키로 퇴근하는 길이었다. 이 날은 팀원들이 모두 비즈니스 석에 앉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동료들은 비행기의 앞 좌석에 피곤에 젖어 말리려고 널어놓은 수건 짝처럼 널브러져 비행기가 빨리 떠나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내 통로에는 늦게 도착한 승객들이 부랴부랴 마지막 탑승을 하는 중이었다. 그때 나와 빈 좌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에 앉은 한 동료가 나무늘보의 속도로 몸을 뻗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방금 지나간 사람 봤어? 핀란드 대통령이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탑승이 이어지는 가운데, 동료의 말을 듣고 슬쩍 뒤를 돌아보니 비즈니스 석의 맨 마지막 줄에 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막 자리에 앉는 중이었다. 그가 안전벨트까지 차고 고개를 들었을 때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지만, 나는 대통령의 얼굴을 잘 모르기 때문에 동료의 말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무지함에 대한 핑계를 대자면, 핀란드는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줄이고 국무총리의 행보가 활발한 내각제에 더 가까워 요즘 같은 팬대믹에 새로운 정책이 발표될 때면 국무총리가 등장했다. 게다가 2019년 서른네 살의 젊은 여성이 국무총리가 되면서 그녀의 얼굴은 신문, 뉴스, 잡지 표지에 심심찮게 등장하며 화재를 일으켰다. 반면에 대통령은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몇 번 본 적이 있긴 한데, 얼굴은 잘 기억나질 않았다.)
피곤에 쩔은 동료가 굳이 이런 쓸데없는 농담을 할리는 없었지만, 적어도 내 상식대로라면 대통령이 일반 승객들과 섞여 줄을 맞춰 탑승할 리도 없었다. 제일 먼저 탑승해서 앉아 있거나, 어디선가 앉아서 줄을 다 기다렸다가 마지막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승객들 사이에 끼어서. 게다가 워낙 비즈니스맨들이 많이 타는 스톡홀름 <-> 헬싱키 노선에서 양복을 입의 그의 모습은 업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고단한 회사 이사나 사장 정도를 연상시켰다. 나중서야 보니 대통령의 앞, 옆으로 건장한 경호원들이 앉은 것을 알아차렸지만 대통령의 존재를 몰랐다면 그들 또한 그냥 체격이 좋은 비즈니스맨이거니 했을 정도로 비행 내내 어떤 특이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대통령과 나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 옆으로 앉았고, 내가 간절히 원했다면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할 수도 있었던 거리였다. 물론 나도, 내 동료들도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는 대통령과 빈자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은 옆 승객도.
대통령의 얼굴을 한 번 흘끔 보고, 동료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와 마찬가지로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대통령이 투명인간인 것처럼. 어쩌면 핀란드에서 비행을 오래 하던 동료들이니 너무 자주 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몸을 뻗어 옆 동료에게 귓속말로 대통령을 이 전에 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아니, 처음이야."
비행기가 이륙하고 샌드위치를 주는 스낵 서비스가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만일 내가 승객이 아닌 승무원으로 이 비행기에 탑승했다면, 대통령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궁금해졌다. 곧 시작할 서비스를 지켜보면 되었지만, 이를 못 기다리고 나는 다시 몸을 뻗어 같은 동료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나보다 승무원 경력은 훨씬 짧지만 핀란드인이니 더 잘 알 것 같았다.
"일반 승객과 동일하게 대해야 할 거야. 대통령도 그걸 원할 거고."
별로 놀라운 대답은 아니었다. 사실 거의 예상했었다.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핀란드 국적기에서 일을 하면서 나 또한 어쩌면 보통의 핀란드인들보다 핀란드 유명인사들을 많이 봤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직접 알아보지 못했고, 유명인들이 승객으로 탈 때면 동료들이 내 귀에 대고 속삭여줬다.
"저 사람이 누군 줄 알아? 유명한 핀란드 가수야"
"패션 디자이너, 핀란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영화배우야"
"가수, 한물갔지만 그래도 다들 알지"
동료들의 말대로라면 누구나 알아볼 만 큼의 셀럽들이었지만, 주변에 앉은 승객들의 반응은 그에 반해 너무 무미건조했다. 아무리 일부러 못 본 척을 한다고 해도 저렇게 다들 연기를 잘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들의 사생활이니까"
동료들은 주변 승객들의 무심한 반응을 이렇게 설명했다. 물론 그건 나도 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그 순간은 그들의 직업적 위치에서 완전히 벗어난 그들만의 시간이다. 공간도 육지가 아닌 하늘. 직업을 발휘해야 할 카메라도 없고, 심지어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사말 정도는 건넬 수 있지 않을까. '반가워요'라든가, '당신의 노래를 참 좋아해요', '영화에서 당신의 연기는 정말 감동적이었어요'와 같은 긍정적인 말들 말이다.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비행기에 탄 유명인을 알아본 동료들은 그들이 주변인들로부터 불필요한 주목을 받지 않도록 다른 승객들과 동등하게 대했다. 이런 동료들이나 주변의 승객들 모두 그 존중과 배려심이 어찌나 갸륵한지, 오히려 유명인이 그 유명세를 체감할 틈을 안 주니 섭섭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연예인들이 나타났다 하면 일반인, 직업기자 할 것 없이 대포 카메라를 들고 달려들어 '공항 패션', '공항 샷'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해버리는 타국가와는 참으로 대조되었다. (한국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님). 이런 상황이 비일비재하기에 이를 이용하듯 연예인들은 협찬사의 옷과 가방을 잔뜩 걸치고 나타나는것이 아닌가.
비행기에 오르는 동료들.
비행기 안에서 본 핀란드 유명인들의 태도 또한 남달랐다. 주변 사람들을 의식해서 외모나 표정에 신경을 쓰는 눈치가 전혀 아니었다. 중년의 여자 배우는 메이크업을 하지 않아 백인 피부 특유의 붉은 기가 얼굴 표면에 그대로 드러났다. 헝클어진 머리를손가락을 빗 삼아 어찌나 쓸어 내리던지, 내 여행가방에 있는 드라이기를 꺼내 한 번 손질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일반 승객들과 섞여 이코노미석에 앉아있던 그녀는 비행기가 지연되자 짜증이 난듯한 표정을 지어내기도 했다.
또 다른 비행에서는 앳된 얼굴의 여가수가 항공기가 이륙하자마자 승객들이 콩나물시루같이 빼곡하게 찬 이코노미석에서 세상 편한 자세로 곯아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국민의 대다수가 '사생활 존중'과 같은 기본적인 에티켓에 이렇게 한결같이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나라라면 연예인도 꽤 할 만한 직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대통령을 대하는 자세는 조금 다를 줄 알았다. 단순한 셀럽이 아니라 정치인이니까 말이다. 사생활을 존중하여 악수를 부탁하는 사람은 없을 수 있다 쳐도, 욕을 한다거나 날계란을 던지는 사람 또한 없을 거라고 가정했기에 이렇게 대통령의 순조로운 민간항공기 여행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얼마 전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마르세유에 지방 순회를 갔다가 시민한테 뺨을 맞는 일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것도 바리케이드가 쳐있고 보디가드도 있는 앞에서.
여하튼 이 날, 핀란드 대통령은 이코노미석과 좌석은 같고, 서비스만 다른 비즈니스 석 (유럽 국가를 운행하는 기종은 보통 소형 에어버스로 별도의 비즈니스 좌석이 설치되어 있지 않음)에서 일반승객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커튼을 열고 두 명의 승무원이 음료와 샌드위치가 든 카트를 양쪽으로 끌며 나타났다. 기존의 서비스와는 다르게 맨 앞 줄이 아닌 대통령이 앉아 있는 맨 뒷줄부터 서비스를 시작했다(승무원이나 자주 비행하는 승객이 아니면 눈치조차 챌 수 없는 차이였다).
통로석에 앉은 대통령은 달랑 물 한 잔만을 시켰다. 반면에 그와 빈 좌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창가석에 앉은 일반 승객은 물, 샌드위치, 또 다른 뭔가를 주문하며 쉴 새 없이 대통령 앞으로 그가 시킨 것들이 지나가게 만들었다.(물론, 그 승객은그럴 권리가 충분히 있었다.)
대통령과 대각선 맞은편에 앉은 나는 안 보려고 해도 자꾸 눈을 흘깃 거리며그쪽을 보게 되었다. 주변 동료들의 반응 또한 번갈아가며 살폈지만, 열심히 눈 알을 굴리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헬싱키에 도착하니, 비행기가 멈춘 창 밖으로 대통령을 모시고 갈 차량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통령보다 먼저 짐을 챙겨 내린 동료들은 그제야 쑥떡쑥떡 거리며 '대통령 본 썰'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렇게 호들갑을 떨 사람들이, 한 시간 동안 빨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니.
혹시 외국인인 내가 대통령을 못 알아봤을까 봐 염려(?)한 또 한 동료가 내게 와 귓속에 대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