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버전의 ‘블랙 미러’
‘비포 시리즈’에 출연해 뭇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배우, 에단 호크가 최근 자신이 들은 희한한 일을 언론에 밝힌 적이 있다. 그는 특정 프로듀서들이 자신의 작품 캐스팅에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중요한 가치로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저격했다. 특정 작품의 역할을 맡기 위해서는 일정 기준 이상의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필요하다는 것. 그는 이런 현상에 대해 ‘미친 짓’이라고 일갈을 날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만 그런 입장을 밝힌 것은 아닌 것 같다. 넷플릭스 드라마 ‘웬즈데이’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배우 제나 오르테가도 버라이어티 지 인터뷰에서 이상한 현실에 대해 괴로움을 호소한 적이 있다. 인터뷰어로 나온 엘르 패닝(다코다 패닝의 동생이다)과의 자리에서 그녀는 인스타그램 ‘관리’에 대한 조언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 미디어에서 얼마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가 작품 캐스팅에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며, 그녀를 관리하는 에이전시에서 그녀에게 ‘미디어 특강’을 한 사실을 이야기하며 괴로움을 호소했다.
심지어 웬즈데이를 끝내고 다른 작품 오디션을 보는 과정에서, 그녀는 인스타그램 팔로워 압박을 느꼈다고 말한다. 결국 그 작품은 캐스팅 되지 못했는데, 연기력에 있어서 부족한 부분이 없으나, 그녀의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다른 배우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이 프로듀서에게 들은 거절 답변이었다. 그녀는 황당해 하면서 이런 현실에 절망감을 느낀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엘르 패닝도 이에 공감하며 현재 할리우드 업계에 만연한 현실이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미디어에 친숙하지 않고, 인스타그램을 좋아하지 않는 제나 오르테가는 배역에 캐스팅 받기 위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스타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비극이다.
기묘하고도 이상한 현실이다. 어찌 보면 제나 오르테가가 출연한 ‘웬즈데이’ 세상 보다 현실이 더 이상한 세상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연기력과 외모를 보는 미디어 업계에서 이제는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는 세상이라니! 아무리 차별과 멸시가 기본 장착된 할리우드 연예계라고 해도, 상식선을 벗어나는 요구에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숨이 막힌다. 할리우드에 연기력 좋은 배우들이 사라지고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배우들이 발연기를 하는 것도 새삼 이해가 간다. 캐스팅 디렉터들이 팔로워 수로 배우를 선정하니 벌어진 사단이었다.
그들은 ‘미디어 영향력’이 흥행의 주요 요소고, 마케팅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수천만 팔로워를 이끄는 유명 스타들은 태그 하나, 게시물 하나에 엄청난 수의 팬들이 움직인다. 기업도 이를 잘 알고 있어서 엄청난 돈을 지불하며 이들 배우들에게 광고를 맡긴다. 돈이 우선인 할리우드에서, 상업적 성공이 제1가치인 할리우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엄청난 돈을 들여 영화를 제작하는 제작사 입장에서, 팔로워 수가 많은 배우의 SNS 채널은 돈 들이지 않고 홍보 효과를 볼 수 있는 좋은 창구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작품을 만드는데 있어 배우의 연기력과 외모보다 더 앞설 수 있단 말인가? 본질을 외면하고 껍데기만 추종하는 꼴이다.
사실 이 얘기를 길게 다룰 생각은 없었다. 일반인들과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이 이야기를 다룬 이유는 브런치에서 어떤 글을 봤기 때문이다. 특정한 당사자 저격이 될 수 있기에 최대한 비껴서 설명하겠지만, 그 글에서는 인스타그램 팔로워 확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대체제가 많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당연한 일’이라는 주장. 배우들은 대체되기 쉬운 직군이고, 살아남기 위해 팔로워를 모으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분은 추악한 현실이더라도 배우들이 성공하려면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여 팔로워를 늘리라고 주문한다.
그분은 AI 퍼스널 브랜딩을 하라는 둥, 배우가 쉽게 할 수 없는 일들을 너무 쉽게 이야기한다. 심지어 위에서 예시로 든 제나 오르테가-엘르 패닝의 인터뷰 장면까지 사용하면서 말이다! 완전히 사실을 왜곡한 설명으로 자기 말을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보고 너무 열이 받았다. 한 배우의 절망을 손쉽게 자기계발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한 것이다. 심지어 배우의 현실을 잘 모르는 프로그래머 출신이 이런 글을 쓴 게 더욱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배우에게 가장 먼저 갖춰야 할 자질은 연기력이다. 역할에 맞는 이미지 변신 능력도 필요하고 여러 능력을 갈고 닦는 것 역시 배우에게 요구되는 일이지만, SNS는 아주 한참 뒤에, 중요 순위를 놓으면 마지막 단에 언급될만한 부분이다. SNS 팔로워는 배우가 얼마나 뛰어난 활약을 했는지에 따라 변화되는 허상이다. 심지어 어떤 이슈가 있으면 순식간에 출렁이는 것이 SNS 팔로워다. 그런 것을 기준으로 배우 캐스팅이 결정되는 것은 불합리하다 못해 ‘미친 짓’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걸 동조하는 것도 배우들을 모욕하는 일일 것이다. 할리우드의 기형적인 캐스팅 현실을 가져와 자기계발과 합리화에 써먹는 것은, 배우를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이들에게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심각한 왜곡 행위다.
SNS 팔로워는 중요하지 않다. 숫자가 늘어나면 사람들은 착각하게 된다. 마치 이 사람이 능력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 숫자는 숫자일 뿐, 구독자는 이 채널 콘텐츠를 보고자 하는 사람의 숫자일 뿐이지 이 사람의 능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헤일로 효과(Halo Effect)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숫자로 그 사람의 능력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숫자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구독 숫자가 올라가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운 적인 요소도 함께 작용한다. 그냥 재미 삼아 눌렀을 수도, 그 사람을 응원하기 보다 생각 없이 눌렀다가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인플루언서들은 숫자 덕분에 자신이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길게 활동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다가 무너지는 경우를 여럿 보았다.
플랫폼이 보여주는 반짝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그것에 집착하고 그 숫자를 쌓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그게 잠깐은 빛나 보일 수 있어도 길게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이 지나 그 플랫폼이 사라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가치와 능력은 없어지는 것인가? 반짝이는 것이 모두 황금은 아니다. 옛 격언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때다.
P.S. 한국은 '아직' 할리우드처럼 팔로워 수에 집착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른다. 할리우드의 기형적인 시스템이 금방 정착될지도, 나쁜 것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배우는 곳이 연예계니까 속단할 수는 없다. 다만 한국은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