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방전된 스마트폰 때문에 미아가 된 그녀.
친구는 마지막 날을 미술관 투어로 불태우고 싶어 하는 나를 위해서 친구의 핸드폰과 내 핸드폰을 바꿔주었다. 친구는 꼼꼼하게 한국에서 오프라인 미술관 가이드 북을 미리 다운로드하여왔다. (실시간 스트리밍은 꿈도 못 꾸던 시절..) 친구는 정해진 일정보다 미리 떠나게 된 나를 불쌍히 여기며 잘 보고 오라고 배웅해주었다. 친구는 다른 일정을 소화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폰을 바꿔가지고 다시 만날 장소를 정한 뒤 헤어졌다. 친구의 조금은 낡은 아이폰4와 함께 루브르, 오르세 등의 미술관으로 혼자 떠나게 되었다.
나는 쓸데없이 전시를 보면 가이드를 매우 매우 자세히 듣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몰입해서 한 미술 작품 앞에서 가이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듣곤 한다. 하지만 그때 만은 자제했어야 했다는 것을 그 당시엔 꿈에도 몰랐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세 시간씩 오디오며 화면을 계속 키고 들었더니 핸드폰의 배터리는 금세 바닥을 보였다. 15프로 정도 남았을 때쯤 나는 오르세 미술관을 나와서 친구와 약속한 장소로 가기 위해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나는 가끔 지나치게 쓸데없이 감성적인 편인데, 겨울의 우울한 파리 하늘과 함께 회색 빛으로 넘실거리는 센 강을 보니 ‘midnight in paris’의 ost를 꼭 들으며 이 여행을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 생각을 막았다면 난 미아가 안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겨울의 파리는 춥고 우울했다. 겨울비도 내리기 시작했으니 여행 마지막 날의 내가 센티해졌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작 노래를 바꿔대기 위해서 친구의 아이폰을 그 차디찬 겨울비 속에 내몰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노래에 맞추어 센티해진 생각을 뒤로하며 친구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걸어가고 있었다. 오분쯤 노래를 즐기며 걸었을까? 노래는 갑자기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화면을 확인했다. 검은 화면이다. 홈 버튼을 여러 번 누르고 전원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충전이 필요하다는 화면만이 확인 사살을 할 뿐이었다. 핸드폰이 꺼진 것이었다.
분명 배터리를 15프로를 남겨두었는데...(나름 배터리를 계산한 후 노래를 들었던 나였다.) 무슨 영문인지 핸드폰은 켜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 핸드폰이 추운 날씨 때문에 방전되고 말았던 것이다. 요즘의 최신 폰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만... 당시의 스마트폰에서는(특히 아이폰4) 꽤나 흔한 현상이었다. 단지 나에게 그 현상이 이 시점에 일어날 줄은... 내가 가진 유일한 지도도, 시계도, 친구와 다시 만나기로 했던 약속 장소에 대한 정보도, 묵고 있었던 한인 민박 정보도 모두 그 검은 화면과 함께 증발했다.
폰이 꺼지자마자 감성 돋던 파리 거리가 순식간에 어두워진 건 왜일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겨울비와 센 강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갑자기 날은 어두워져, 밤이 되었다. 나는 그날 밤 12시에 메가버스를 타고 런던으로 떠나야 했던 상황이었다. 폰이 꺼져서 숙소 주소조차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11시까지는 묵고 있던 한인 민박으로 돌아가 짐을 챙겨서 나와야 했지만 나는 당장 내가 서있는 곳에서 역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어졌다. 전혀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난 프랑스어를 하지도 못해서 누군가에게 길을 묻기엔 겁이 났다. 표지판도 솰라솰라 프랑스어라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심지어 갑작스레 비가 오고 있었으니 지나가는 행인도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겨우 인기척을 느끼고 나는 거리의 유일한 사람을 발견했다. 어두워진 거리가 너무 무서워서 그 사람을 하염없이 따라서 걸었다. (그 사람은 내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강도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그 사람을 따라 걷다 보니 시내로 나오게 되었고, 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연을 가장해 이야기를 진행하는 전래 동화 같은 일이 가끔 삶에는 일어난다. 전혀 인과 관계란 없었고 그냥 우연성에 의지한 결과였다. 신이 있다면 나를 도우셨던 것일 것이다.
그러나 역을 발견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역에 막상 들어가니 내가 친구와 만나기로 한 역이 어딘지 도저히 모르겠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묵고 있는 한인 민박이 무슨 역인지도 도저히 기억이 안 났다. 나는 포기를 모르고 지독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그냥 겨우 찾아낸 역 주변의 경찰서를 찾아가도 되었을 일인데, 지형과 함께 그려진 지하철 노선도를 한참을 쳐다보니 왠지 약속한 장소가 어딘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내 기억이 맞기를 바라며 한 역을 골라 무작정 그 역으로 이동했다. (무모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역에 도달했을 때, 내가 어떤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무 많은 출구가 있었다. 결국 이젠 정말 경찰서를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출구로나 나온 나는 우연히 경찰관을 발견하고 그 경찰관에게 길 잃은 관광객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그는 호텔이 어디냐, 지인 연락처가 있냐 등의 형식적인 질문들을 물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모른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아이폰 충전기 하나만 빌려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만 말했다.
그러자 그가 자기는 충전기가 없지만 경찰서에 확인해 볼 테니 같이 가자고 했다. 난 이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아이폰 충전기는 여기저기 널린 것이니까. 경찰서에 한 분 정도는 아이폰 충전기가 있을 것이니까, 이제 친구를 만날 일만 남았다고 굳게 믿었다. 아니 믿었다기보다 당연하게 생각하며 경찰서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 당시 유럽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매우 매우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