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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결하다, 백합

by 모즈

1884년,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가 파리 살롱에 '마담 X'를 공개하자 대중과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큰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논란의 시작은 다름 아닌 '드레스'에서 비롯되었어요. 모델이 입고 있는 검은 드레스가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당시 이 그림의 모델은 버지니 아멜리 아베뉴 가트로(Virginie Amélie Avegno Gautreau)로 알려져 있습니다. 긴 이름답게 파리 사교계에서 세련된 스타일과 대담한 매력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어요.

그림 속, 그녀의 창백한 피부와 검은 드레스의 극적인 대비 그리고 우아한 자세는 사전트의 뛰어난 색채 감각과 구도를 보여줍니다. 배경은 단순하고 어두운 색조로 처리되어 모델의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해요.

대체 이 그림이 무엇이 문제가 되었던 걸까요?

Portrait of Madame X 1884, 이미지 출처 wikiart


흘러내린 어깨끈


바로 드레스의 오른쪽 끈이 어깨에서 흘러내린 상태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 보수적인 프랑스 사회에서 다분히 충격적이며, 부도덕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에따른 후폭풍은 실로 거셌어요. 일부 평론가들은 이 그림을 노골적으로 유혹적이라 혹평을 했고 파리 상류층에서는 모델 가트로와 사전트를 둘러싼 소문마저 일기 시작했어요. 물론 사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거짓된 소문들이죠. 이로인해 가트로는 모델로서, 그리고 파리 상류사회 일원으로서 큰 타격을 입습니다. 한동안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기도 해요.

사전트 역시 꽤나 힘든 시기를 보냅니다. 주로 초상화를 그렸던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초상화 의뢰가 뚝 끊기게 돼요. 미국 출신으로 부유하고 자유로운 가정에서 자라 서전트는 이 일로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결국 흘러내린 드레스 끈은 다시 어깨 위로 그리는 것으로 수정해요. 지금의 그림에서 어깨끈이 원 위치(?)에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전트는 지긋지긋한 파리를 떠나 런던에 정착합니다.


사실 사전트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많았을 것 같아요. 고작 '어깨끈'이라니요. 이는 한편 살롱을 비롯한 파리 상류층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한 것 같아요. 당시 파리 상류층에는 지금의 관점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도덕적해이가 있었어요. 그런 사회에서 이 그림을 비난함으로 자신의 순결함을 내세우려고 했던 것이지요.

일부 기록에 따르면 살롱 관람객들이 그림 앞에서 공개적으로 조롱하거나 충격을 받은 척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는 다시 파리 상류층의 위선적인 태도를 풍자하는 가십으로 이어졌습니다. 파리의 귀족들이 이 그림 앞에서 두손으로 입을 가린채 '어머, 어머' 하는 모습이 풍자의 대상이 된 것이죠.

사전트의 그림을 풍자하는 사람을 풍자한다. 정말 코메디 같은 일입니다.

어쨋거나 사전트의 상처 뿐인 파리에서의 활동은 이렇듯 찝찝하게 막을 내립니다.


나는 순결하다


억울했던 걸까요. 아니면 화가났던 걸까요. 사전트는 마담X를 발표한 이듬해, 완전히 달라진 화풍과 주제로 새로운 그림을 선 보입니다.

Carnation, Lily, Lily, Rose 1885-86, 이미지출처 wikiart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Carnation, Lily, Lily, Rose' (1885-86)

꽃 이름만으로 지어진 제목이 특이하게 느껴집니다. 이 그림의 배경은 영국에서도 가장 목가적인 분위기를 가졌다고 알려진 코츠월드의 어느 정원이예요. 파리를 떠난 사전트는 친구인 프랜시스 밀렛과 가까이 지내며 조용히 작품 활동에 몰두 합니다. 이 정원도 밀렛의 집 근처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요, 그림의 모델이 되는 두 아이 역시 밀렛의 두 딸인 폴리와 도로시입니다.

황혼 무렵, 꽃이 만개한 정원에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두 소녀가 종이 등불을 들고 있습니다. 소녀들은 등불을 켜려는 것인지 자신들의 행동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이들 사진을 찍을 때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해도 자기들 할 것만 하는 그런 천진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두 아이를 캔버스 중앙에 넣은 구도는 안정적으로 느껴지지만 몽환적인듯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입체감을 주어 보는 사람도 마치 정원에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이 그림은 마담X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담X의 세련되고 도회적인 느낌의 모델은 순진무구한 아이들로 바뀌었구요, 도발적인 검은 드레스 역시 순결한 흰색 드레스로 바뀌었습니다. 마담X에서는 모델을 부각하기 위해 배경을 모두 차가운 상태로 배제했다면 이 그림에서는 꽃이 가득핀, 따뜻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제목마저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인데요 이는 당시 유행하던 동요가사로 밀렛의 아이들이 자주 흥얼거렸던 부분이라고 해요. 어때요? 무엇하나 흠잡을 것이 없지요? 이는 마치 마담X로 인한 스캔들로 고통 받았던 서전트가 '나는 순결하다'며 항변하는 것으로 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순결의 꽃 백합

백합(학명 Lilium spp.)은 백합과의 다년생 초본 식물로 긴 줄기와 크과 화려한 꽃이 특징입니다. 색상은 개량을 통해 흰색, 노랑, 분홍, 주홍등 다양하게 볼 수 있어요. 온대지역 전체에 걸쳐 자생하며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재배되고 있습니다.

백합 이미지출처 pexels


백합의 꽃잎은 특이하게 겉꽃잎과 속꽃잎으로 나뉘는데요, 겉꽃잎 3장, 속꽃잎 3장 이렇게 총 6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숫자 3의 상징성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성삼위일체'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프랑스의 카페왕조 처럼 왕실의 문장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인 유래도 아주 깊어서 이미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부터 등장을 하는데요, 헤라와 비너스 등 주요 여신들과 결합된 이미지로 백합이 쓰였습니다.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여신의 이미지를 가진 백합은 자연스레 성모 마리아와 연결지어지게 됩니다. 중세 이후 부터는 백합이 마리아의 순결을 나타내는 심볼로 자리잡게 되는데요, 특히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서 동침하지 않은 채로 예수를 잉태하게 되는 것을 알리는 '수태고지'를 그린 장면에서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파올로 드 마티스 '수태고지' 부분 1712년 작

이렇듯 오랜 역사를 가진 백합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꽃말이 완성될 무렵 당연스레 '순결'이라는 단어를 낙점 받기에 이릅니다. 과연 '백합이 아니면 그 어떤 꽃이 '순결'이라는 의미를 받을 수 있겠어'라고 할 정도이지 않나요?


실력으로 회복한 명성


마담X로 인한 일련의 사건들은 분명 사전트에게는 큰 아픔이 되었을 거예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리를 떠나기도 했고, 또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그림을 시도하기 까지 했으니까요. 정말이지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하기 위해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를 그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작이 그렇다 해도 그가 이 그림에 대한 진심을 간과해서는 안 될것 같아요.

사전트는 황혼의 미묘한 빛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매일 저녁 십여분 동안의 짧은 시간만 작업을 했다고 해요. 십분의 시간이 넘어가면 빛과 색이 바뀌기 때문에 화구를 접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 매일 십분 작업을 두 번의 여름이 지나는 2년에 걸쳐서 합니다. 긴 시간의 노력으로 등불의 따뜻한 빛과 주변의 차가운 푸른빛이 주는 몽환적 대비를 완벽히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지금까지의 스타일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전트는 사실주의에 기반한 전형적인 초상화가 였어요.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인상주의로의 변화를 꾀하게 됩니다. 이후 그의 그림은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두루 아우르고 초상화는 물론 풍경화와 종교화까지 영역을 넓히게 됩니다. 분명 그의 위기가,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지요.

물론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는 그의 천재성이 뒷받침 되어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는 1887년 발표 되었을 당시 큰 찬사를 받습니다. 지난 날의 망가졌던 명성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는 것이죠. 또한 '마담X' 역시 훗날 재평가를 받게 돼요. 불필요한 가십들을 빼고 보면 뛰어난 작품임에는 이견이 없으니까요.

역시 가십은 그저그런 악플에 지나지 않았던 것들이고 이 모든 것을 잠재우는 건 작가의 뛰어난 재능일테죠.

'마담X'와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는 각각 뉴욕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에 소장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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