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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합당한 이름, 장미

by 모즈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과의 이별의 아픔을 '미라보 다리'라는 역작의 시로 승화시킵니다. 그들의 연애는 약 5년 남짓이지만 서로를 뮤즈와 예술적 동반자로 여기며 평생을 아낍니다.


정치인이었던 생부의 외도로 태어난 로랑생은 어머니와 함께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만 했어요. 아버지로 부터 어느 정도의 경제적은 도움은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생아로서의 결핍은 그녀에게 상처로 자리잡았을 거에요. 결국 훗날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게 된 로랑생은 지금껏 그렸던 남자를 모두 여자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후부터, 특히 아폴리네르와의 이별을 겪은 후 부터는 그녀의 그림에서는 좀처럼 남자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돼요. 하지만 이러한 고난의 과정이 그녀만의 부드러운 색체와 독창적인 그림을 만들어 가게 되는 힘이 됩니다.


시작은 빨래배에서

도자기와 유화 교육을 받은 젊은 로랑생은 자연스레 몽마르뜨로 향합니다. 당시 이곳은 파리의 비싼 물가와 임대료를 피해 모여든 가난한 예술가들의 아지트와 같은 곳이였어요. 특히 낡고 기울어진 외관이 마치 센강에 떠 있는 세탁선과 닮았다고 해서 '빨래배(바토 라부아르 Bateau-Lavoir)라 불리는 건물에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조르주 브라크 같은 화가는 물론 막스 자콥과 기욤 아폴리네르와 같은 문인들의 작업실도 입주해 있었답니다. 지금에서야 세계의 거장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젊은 작가들의 집합소 같은 느낌이었겠네요.

아폴리네르와 그의 친구들 1909, 출처 wikiart


피카소와 가까워진 로랑생은 그의 작품을 답습하며 입체주의(큐비즘)의 매력에 빠져듭니다. 혹자들은 로랑생을 피카소의 제자나 유일한 여성 입체주의 화가라 평가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지만 저는 그저, '그것은 과정이었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후 부터 그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되니까요.


좌 Young Girls 1910, 우 The Dance in the Country 1913 출처 wikiart


1912년, 아폴리네르와 결별한 로랑생은 몽마르뜨를 떠나며 완전한 자신만의 색채를 만들어 갑니다. 선은 한층 부드러워지고 색감은 다양해 집니다. 이별 후 여성성의 매력에 더욱 빠져드는 듯한 행보를 보이지만 1913년, 독일 출신의 화가와 결혼을 하게 돼요.

이 무렵 유럽 전체에 전운이 감돌며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아폴리네르는 징집이 되어 전장으로 떠나고 독일인 남편을 둔 로랑생은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두 사람은 영원히 다시 만나게 되지 못하지만 간간히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안부를 묻습니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두 사람의 예술적 교감 만큼은 이어져있던 것일까요. 저 역시 조금은 애틋한 마음이 저며듭니다.

Two Sisters with a Cello 1913 출처 wikiart


모든 남자들이 떠나고


1918년, 스페인에 있던 로랑생은 두 통의 충격적인 편지를 동시에 받게 됩니다.

하나는 아폴리네르에게서 온 것으로, 몸이 너무 안 좋아 어쩌면 앞으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구요 다른 하나는 아폴리네르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이었습니다. 아폴리네르는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하게 된 것이였어요.

유럽에서 제 2의 흑사병이라 불리던 스페인 독감이 아폴리네르에게도 닥친 것이지요. 그는 거친 호흡으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동안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로랑생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습니다.


이 무렵 부터 그녀의 그림에는 새, 강아지나 고양이 그리고 꽃등 다소 연약한 이미지를 상징하는 요소들이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Woman with Dove 1919 출처 wikiart


아폴리네르가 떠났으며, 전쟁도 끝이나고, 6년 간의 짧은 결혼 생활에도 종지부를 찍은 로랑생은 1920년 파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 부터 그녀의 새로운 삶은 시작 됩니다.


다시, 파리


많은 사람들의 우려했던 바와 달리 파리로 돌아온 로랑생은 화가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특히 그녀의 연약한 듯 몽환적인 그림체는 전쟁 후 사회적으로 위상이 높아진 여성 셀럽들에게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돼요. 코코 샤넬 역시 로랑생의 팬으로 그녀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었는데요, 어둡고 무기력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샤넬은 그림 받기를 거부 하며 수정을 원해요. 하지만 로랑생은 그녀답게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 합니다. 결국 이 그림은 샤넬에게 가지 못한 채 로랑생이 보관하게 돼요.


샤넬과 로랑생의 일화는 한편 로랑생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입지를 다지며 그의 그림이 인정을 받고 있었는지 방증해 주는 것 같아요. 비로소 그녀는 창작의 날개를 달고 완전한 그녀만의 화풍으로 완성해 나갑니다.


좌 Young Girl with a Garland of Flowers 1935, 우 The Rehearsal 1936


그녀에게 합당한 이름 장미


노년이 되면서 더욱 풍성한 색채를 가지게 되는 로랑생의 그림에는 화려함 만큼이나 다양한 꽃들이 등장하게 돼요. 아무래도 여성 화가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꽃 만한 것이 없었을테죠? 백합, 데이지, 양귀비를 비롯해 장미로 보이는 꽃들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자녀가 없는 로랑생은, '내게 만약 딸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거야' 라고 상상하며 그림을 그려요. 꽃을 든 소녀, 1930년 작품입니다. 이 소녀의 손에는 한 눈에 보아도 장미로 보이는 꽃이 들려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pexels


아마 장미를 모르시는 분은 없을 거예요. 플로리스트인 저 역시 좋아하고 또 가장 많이 사용하는 꽃 중에 하나입니다. 작업실 가득 장미가 꽂혀 있는 것만 봐도 온 마음이 풍족해 지는 기분이예요.

장미 재배의 역사는 무척 오래되어 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중국 등 문명이 시작된 거의 모든 곳에서 길러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가히, 문명과 함께 시작된 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래된 역사 만큼 종도 무척 다양한데요, 자연에서 피어나는 야생종만 해도 최대 150여 종이 되고 교배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종 또한 비슷한 수에 이릅니다.

이렇듯 역사도 길고 종류도 다양해 어디서나 친숙히 볼 수 있는 이유로 장미를 꽃 중의 꽃이라 하나 봅니다.


지금껏 꽃과 그림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꽁꽁 아껴둔 꽃이 바로 장미예요. 섵불리 장미가 가진 이미지와 연결되는 화가나 그림이 떠오르지 않거니와, 설령 떠오른다 해도 억지로 하는 의미부여가 아닐지 고민하고 고민하다 결국은 마음을 접은 경우가 많았거든요. 하지만 로랑생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장미와 꼭 맞는 화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

겹겹이 쌓여있는 장미의 꽃잎 처럼 마음 속에는 확고한 그녀만의 흔들리지 않는 세상이 있고, 진한 향 처럼 화려한 삶만 있을 것 같지만 그 속을 관통해온 아픔이 있으며, 샤넬과의 일화에서 처럼 마음대로 쥐려고 하면 품은 가시를 드러내는 사람. 저는 감히 마리 로랑생은 장미라 생각해요.


장미 한송이와 묻히고 싶다


로랑생의 마지막 또한 장미가 함께 합니다.

그녀는 생전 '내가 죽으면 하얀 드레스를 입고 아폴리네르의 편지, 그리고 장미 한 송이와 묻히고 싶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어요.

1956년 초여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그녀는 바람대로 사랑이 가득 담긴 아폴리네의 편지를 품에 안고 장미 한 송이를 손에 쥔 채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 영원히 깨지 않을 잠에 들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도 로랑생의 묘지 위에는 그녀를 추억하는 이들이 놓고 가는 장미 한 송이들이 끊임 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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