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대
벨 에포크(Belle Époque)는 불어로 아름다운 시대를 말합니다. 19세기 말, 프러시아와의 전쟁이 막을 내리고 프랑스는 황제정이 아닌 대통령과 총리가 정부를 이끄는 제3공화국이 출범하게 됩니다.
전쟁의 충격이야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따랐겠지만 프랑스는 이 전쟁을 전화위복 삼아 곪아있던 내부의 문제들을 해소하고 빠르게 회복합니다. 또한 전쟁의 상대국이었던 프러시아(프로이센)은 오랜 염원인 통일 독일을 이루고 새로운 제국으로 발돋음 하게 돼요. 유럽 내 힘의 균형이 표면적으로는 안정을 찾게 된 것이죠.
이후 유럽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40년 동안 전쟁 없는 평화시기가 이어져요.
나라가 안정되자 경제가 활력을 찾습니다. 도시에는 돈이 넘치고 사람들은 늦은 시간까지 여흥을 즐겨요. 살롱을 중심으로 한 미술은 물론 문학 그리고 물랑루즈 등으로 대표되는 대중 문화까지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이 때를 가히, 파리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겠죠?
빅토르 가브리엘 질베르(Victor Gabriel Gilbert, 1847-1933)는 벨 에포크를 누린 대표적인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중 한명 입니다. 파리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보낸 파리 토박이 질베르는 파리 서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이고 따뜻한 색체로 화폭에 담습니다. 질베르는 파리 시내 곳곳을 누비며 그림의 배경으로 그려내지만 특히 그가 애정을 가졌던 장소는 바로 시장이예요.
파리의 배꼽
시장은 언제나 생기가 넘칩니다. 새벽 부터 수레에 오늘 팔 물건들을 잔뜩 싣고 온 상인등은 자신의 자리에 분주히 물건들을 풀어 놓습니다. 옆자리의 상인과 쉴 새 없이 떠드는 수다는 일의 고단함을 잊게 하는 것 같습니다.
상인들의 웃음소리, 흥정하느라 한 껏 들뜬 목소리. 그 왁자함이 그림 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질베르의 그림은 당시의 시대상을 마치 다큐멘터리 사진처럼 담아 내고 있습니다.
평범한 서민에서 부터 귀족들까지, 다양한 계층이 시장으로 모여 듭니다. 마치 도시의 축소판 같은 이 곳은 그 도시가 가진 활력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질베르가 자주 그림을 그리던 '레 알(Les Halles)' 은 파리 1구에 위치한 시장으로, 중세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파리의 주요 식료품 도매시장으로 기능하며 도시의 경제적, 사회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던 곳입니다. 나폴레옹3세 시기, 외젠 오스만에 의해 대대적인 파리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이곳 또한 현대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되는데요, 질베르가 활동하던 당시는 레 알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에밀 졸라는 자신의 소설에서 이 레 알을 '파리의 배꼽'이라 했는데요, 무척이나 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장에는 고기나 생선 등의 식료품은 물론 꽃에 이르기 까지 없는 것이 없었답니다. 벨 에포크 시대는 전시나 공연도 거의 매일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나 예술가 등에 보내기 위해 꽃에 대한 수요도 무척이나 컸다고해요.
예술이 된 일상
질베르는 시장 내 꽃가게에 대한 그림도 무척이나 많이 그렸어요. 한편으로 그는, 마음이 따뜻한 화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시장이라는 북적이는 공간에서 꽃에 시선이 머물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그는 꽃을 사고 파는 사람들을 애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봐 주었고, 그의 캔버스는 꽃과 사람들로 가득차게 됩니다. 파리 시민들의 평범한 일상이 그의 그림 속에서 예술로 다시 태어나는 것만 같습니다.
그의 시선은 시장 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에서 꽃을 파는 노점에도 향해 있습니다. 파리 시내 여러 곳에서 공연이 열렸던 시대이니 만큼 꽃 파는 행상들도 공연 일정에 맞추어 바쁘게 도시를 누볐겠지요?
아, 플로리스트로서 정말 부러운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시의 심장, 꽃시장
꽃시장에 처음 갔을 때의 설렘을 잊을 수 없습니다. 수 많은 꽃들로 가득차 있는 그곳은 초보 플로리스트에게는 천국이었어요.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친숙한 사람들, 꽃들이 뿜어내는 익숙한 향기. 긴 시간 동안 폴로리스트로 일해 오며 직업에서 오는 부담과 불안은 떨칠 수 없겠지만 꽃 시장에 갈 때 만큼은 단 한번도 설레지 않은 때가 없는 것 같아요. 꽃 시장은 꽃으로 방전되 저에게 다시 꽃으로 충전을 시켜주는 곳 같습니다.
질베르의 그림을 보며 무려 15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꽃을 사고 파는 모습은 하나도 변한게 없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시장의 모습도 점포의 모습도, 사람들의 옷차림만 아니면 지금과 하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꽃시장은 도시의 중심에 있는 경우가 많아요. 간혹 도시의 팽창으로 자연스레 밖으로 밀려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원도심의 중심에서 오랜동안 같은 자리를 지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밀 졸라도 시장을 도시의 배꼽이라고 표현했던 것이겠지요. 저는 감히, 허락한다면 꽃시장은 도시의 심장이라고 칭하고 싶어요. 꽃시장의 활력과 생기가 도시 전체에 고루 퍼져 도시를 살아있게 하는 것 같거든요. 꽃이 사라진 도시는 얼마나 삭막할까, 생각만 해도 슬픈 감정이 밀려옵니다.
질베르는 평생 비슷한 주제를 놓고 그림을 그렸어요. 그의 그림체 역시 큰 변화를 겪지 않았고요. 그런 면에서 화가로서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참 행복한 화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그리는 보통의 삶. 그 무난함이 그에게는 행복이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두 세기가 지난 지금, 그의 그림을 보며 행복해 하는 플로리스트가 있다는 것을 알면 그 또한 기뻐하지 않을까요?
우리를 그려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