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돌아오지 못할 길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소망을 인하여 목숨을 바치신 분들께

by 오늘도맑음


합리적 경제인. 경제학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가정, 즉 "인간상"이다. 경제학에서는 각 개인이 개인의 효용을 최대로 보장받는 선택을 한다고 가정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많은 선택들, 심지어 결혼, 연애까지도 이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합리적 이기심의 대상을 조금 더 확장해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호혜 역시 장기적인 이기심에 근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 고귀한 자기희생


그런데 여기, 확장된 자신- 즉 가족, 학교, 직장 등-에 대한 이기심으로 치환해보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상을 바꾼 것은 합리적 경제인이 아니라, (자신은 누릴 수 없음에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몸을 던진 이러한 희생적 개인들이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광복을 위해 기뻐해 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4.19 혁명 당시 사망)


14세에 불과했던 위 유서의 주인은, 헌법에 적힌 민주주의가 종잇조각 취급을 받는 부당한 독재, 폭력에 항거하기 위하여 꽃다운 목숨을 바쳤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는 길에도, 그리고 결국에 최후를 맞이했던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이 그 열매를 맛볼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을 나섰고, 그가 남긴 글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렇게 수많은 아까운 목숨들이 시위 현장에서, 감옥에서, 경찰서에서 이슬로 사라지고 나서야, 혁명은 끝이 났다. 4.19 혁명의 한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 수많은 희생의 고결함과 그 의의는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단 4.19 뿐 아니라, 한국사와 세계사 곳곳에 폭력과 부조리에 항거하는 민중항쟁이 있었다. 그 대상은 6월 항쟁과 같이 독재이기도 하고, 3.1 운동처럼 식민지를 통치하던 열강이기도 하는 등 달라져왔지만, (구체적 대상이 달라지더라도) 잘못된 지배에 대한 항거는 인류 역사에서 여러 번 있었고, 상당히 많은 경우에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어떤 혁명도 다수의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헝거게임 중 캣니스의 손경례는 저항의 상징으로 떠오른다.

얼마 전 헝거게임을 보았다. 독자 국가인 판엠은 캐피톨을 중심으로 주변의 13 구역을 통치하고 있는데, 매년 각 구역에서 남녀 두 명을 뽑아 1명이 남을 때까지 죽이는 게임에 참여시킨다. 12 구역의 캣니스는 당첨된 여동생 대신 이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사냥을 하고, 동생을 지키기 위해 동생 대신 자신의 이름을 추첨함에 넣는 평범한 소녀는, 헝거 게임이 진행되면서 각 구역의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꽃을 심어주는 혁명의 상징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캣니스가 남긴 희망으로 인해 각 구역에서는 판엠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그렇게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결국 판엠을 무너뜨리는 공을 세우게 된다는 이야기다.


사실 캣니스 등장 이전이라고 캐피톨 독재와 폭압에 대한 불만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헝거게임에 참여하면서 캣니스에게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도록 하는 폭정에 대한 저항의식이 생겼고, 그걸 지켜보는 시민들에게는 이 독재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 희망을 품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댐을 폭파시키러 가는 시위대의 모습은 비장하다 못해 웅장해 보이기까지 한다. 맨 앞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몸으로 총알을 막아내면서, 뒷사람만큼은 공정한 사회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만을 남긴 채 죽음을 맞이한다.


희생을 감수하고 댐에 전진하여 폭파시키는 모습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7batfujkDQY


희망이 세상을 바꾼다

프랑스 대혁명 배경으로 언급되는 "앙시앵레짐" (구제도의 모순)은 주로 절망적인 모습으로 읽힌다. "이렇게 사는 것이 죽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절망과 분노에서 혁명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헝거게임을 보면서, 그리고 진영숙 님의 유서를 읽으면서 느껴지는 건, 절망은 변화를 일으킬 힘이 없다는 것이다. 분통을 터뜨리며 감정적으로 표현하거나 희망마저 버린 사람들의 모습은, 캣니스의 등장 이전에 더 많이 그려졌다. 그러면서도 저항하지 못했던 건 자신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군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 군인과는 싸워 이길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결국 이 구조는 철옹성처럼 지속되리라는 절망감, 그것 때문에 그저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내기로 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캣니스가 등장하고, 여러 사건을 통해서 그들 마음에 작은 씨앗이 심어졌다. 희망이었다.



그런 세상이 올지도 몰라.

거센 핍박의 파도 앞에 놓인 촛불과 같은 작은 소망이면 된다. 지난한 절망의 세월을 견뎌온 덕분인지, 작은 희망이 보일 때 사람들은 피 끓는 마음으로 자신을 던진다. 죽어도 살아도 똑같다는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자신은 그 열매를 누릴 수 없을지라도 남은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강한 염원과 희망이 있어야 자기를 희생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후반으로 갈수록 변절자들이 급증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일제 통치가 끝나지 않을 것 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래서 예전처럼 자신을 던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마지막까지 몸과 마음을 다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독립투사들의 당당함은, 결국엔 다시 올 영광에 대한 강한 믿음(희망)이 있기에 가능했다.


좋은 세상으로 희생을 기념하는 것


일제 통치 시기 친일을 자행한 사람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조선의 독립이었을 것이다. 독립이 되면 자신들의 만행에 대한 처벌과 보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이 식민지로 남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독립이 두려우면서도 그런 치졸한 행위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변절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일제 치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절망으로 인해 그들은 일제 편으로 돌아섰고, 그들에게 독립이란 결국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되는 일이자 치욕, 그리고 처벌을 의미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과 다르게 대한민국은 독립했고, 민주주의를 이뤄냈으며, 권력이 국민에게 있음을 여러 번의 혁명을 통해서 증명했다. 성공한 혁명은 아름답다. 혁명 과정에서의 처절한 피흘림이 희생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소망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망을 품고 자신을 내던진 희생적 낙관주의자들 덕분에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더 나은 세상을 선물 받았다. 그러니 우리도 빚진 마음을 가지고 이곳을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들이 꿈꾸던 좋은 세상을 이뤄내는 것으로 그 고귀한 희생을 기념하고, 결국엔 그들의 희망이 옳았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꾼 것은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경제인도 아니고, 세상의 부조리와 어두운 미래에 절망하는 지식인도 아니었다. 순진한 마음으로 미래를 희망하고, 그를 위해 끝내 돌아오지 못할 길인 줄 알면서도 먼저 길을 내 준 희생적 낙관주의자들, 그들 덕분에 세상은 조금씩 더 나은 곳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몸을 던진 순국 열사들의 희생을 기리며, 그들의 결의를 그려주는 고은 시인의 시로 글을 맺고자 한다.




화살

- 고은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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