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참 힘들다. 혹시 사는 게 너무 수월하고, 쉽고, 간단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다. 적어도 산다는 건 힘들어야 정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는 게 버겁다.
잠시 상상을 해보자. 우리에게 '힘든 삶'을 물려준 '조상의 생활'을 말이다. 그분들의 삶은 어땠을까? 그들에게 '굶주림'은 생활이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부모님의 소싯적 이야기를 들어봐도 주린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
굶주림뿐 아니라 질병과 죽음의 공포 역시 일상적이었을 것이다. 포식자를 피해 도망 다니고, 밤에도 깊은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조산, 영아 사망과 같은 일도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들은 '예쁜 몸' 따위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살아 있으면 그 자체가 '예쁜 삶'이었다. 다음 날에도 태양을 볼 수 있으면 '예쁜 삶'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체형과 삶의 태도는 당시에는 매우 부적합했을 것이다.
어쨌든 원시 조상들은 결국 생존해서 오늘날 우리를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승자의 후손'인 우리에게 '삶의 고통' 또한 그대로 물려주었다. '종'을 영원히 유지하라는 의무를 본능에 넣어서 말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에서 잘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는 질적으로 '예쁜 몸'을 가져야 한다. '예쁜 몸'을 갖기 위한 실천의 과정에서 우리는 '멘탈'도 치유를 받는다. 그래서 예쁜 몸의 '궁극적 목표'는 삶 전체의 '질적 향상'이다. 더 너그럽고, 더 다정한 마음으로 살자는 것이다.
예쁜 몸을 갖기 위한 방법이 필요하다. 그런데 예쁜 몸을 만들기 위한 방법은 그다지 예쁘지 않다. 아름답게 포장하고 싶어도 포장이 되질 않는다.
예쁘게 포장되어 있다면 가짜 거나, 목표가 다르거나 아니면 잘못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예쁜 몸을 실천하고 궁극적으로 삶의 질적인 향상을 가져오는 방법은 너무나도 '사실적'일 수밖에 없다. 너무나 '날 것'이고, 너무나 '적나라'하고, 너무 '현실적'이어서 '불편'하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실천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들다. 간혹 살기 좋은 시절도 있었다고 하지만 '경쟁'은 언제나 있었다. 우리가 '승자의 후손'이 듯 우리 역시 경쟁을 피할 수 없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더라도 집단의 이익과 나의 이익을 일치시켜야 살 수 있다. 집단과 나를 동일시해야 살아남는다. 나의 인성과 성정에 상관없이 누군가를 찍어 눌러야 승자가 된다. 누군가의 아픔을 외면하고, 불똥이 튀지 않도록 모른 척해야 한다. 다른 삶의 방법을 찾기 전까지 이 고통은 지속된다.
'불안감'도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한다. 그런데 불안감은 우리를 최악의 상황에 서지 않게 하는 '진화적 배려'이기도 하다. 배려라고 하기엔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상당하다.
우리는 불안하기 때문에 실천한다. 불안하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지독스럽게 생존한다. 불안감은 동기를 부여하고, 결단을 하게 한다.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무엇인가를 실천하고 중단하는 것도 불안감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 삶을 고달프게 만드는 것으로 끝난다.
'삶의 주인공은 나'라는 말을 한다. 정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우리는 수많은 외적인 변수에 의해서 행동을 통제받는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상관없다.
우리는 부당한 대우를 하는 상사에게 끝까지 항의하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약간의 경제적 배려에도 지켜오던, 지켜야 하는 것을 쉽게 내놓는다. 남의 기준에 맞춰 살고, 남이 바라는 데로 살고, 남이 부러워하는 삶을 산다. 그리고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유를 찾고는 스스로 결정했다고 믿는다. 내 삶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들을 불현듯 돌이켜 볼 때마다 삶은 힘들어진다.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사고와 행동들이 반복된다. 바쁘고 진취적인 시절에는 집중하는 일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특정 시점 - 그러니까 40대 즈음이 되면 보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위선적 모습과 모순적인 생각들과 그것을 강요하고, 진실이라고 믿는 행동을 하는 자신을 느낀다. 한국적 표현으로 '철이 든다'라고 표현한다. 철이 든다고 사고나 행동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평생을 위선과 모순에 '적응'하며 살았는데 철든 것과 상관없이 위선적이고 모순된 사고와 행동은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괴리도 삶을 힘들게 한다.
근본적으로 힘든 삶을 사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아주 이기적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이기도 하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경쟁을 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불안하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꺾는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위선적이면서 모순적인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래서 괴롭다.
인류는 이기적이어서 살아남았다. 특히 우리의 조상은 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 가운데 후손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겐 이타심 조차 이기적이었다. 매일, 매 시간, 매 초 생존만이 삶이었다. 살기 위해 살았고, 살기 위해 움직였고, 살기 위해 이기적이었다. 그 DNA가 우리에게 있다.
물론 오늘날은 자연의 척박함 보다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관계의 척박함과 구조와 제도의 척박함이 우릴 옭아 매고 있다. 죽음과 함께 자연의 일부로 살았던 조상들이 행복했을까? 아니면 다른 인간의 도구로 혹은 구조와 제도의 부품으로 사는 우리들이 더 행복할까?
우리가 현재 삶을 힘들게 느끼는 것의 일부는 조상 덕이다. 그들이 남긴 '종의 번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우리는 삶을 버겁고 힘겹게 느낀다. 그래야 동기가 유발되고, 실천을 하고, 위험과 죽음을 대비할 수 있다고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이다. 이 프로그래밍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이 '잘 살' 가능성이 높다.
40대가 되면 우리 삶이 더욱 힘들게 느껴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게 된다. 비슷한 삶의 과정을 밟기 때문에 비슷한 시점이 되면,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노화의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체감할 수 있게 된다. 진화의 증거로 호르몬의 변화를 겪게 된다. 가끔씩 몸과 감정이 토네이도를 만난다. 몸도 정신도 소모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사회, 관계적으로는 과중한 역할이 부여된다. 양적, 질적으로 무리한 일의 수행을 요구받는다. 매일매일 끝판왕 스테이지를 깨야하는 듯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살얼음판을 걷듯이 긴장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들을 감수해야 한다. 그저 '익숙함'만이 이런 상황을 반복할 힘이 된다.
'후회'하기 충분한 지난날이 있다. '불안'하기 충분한 다가올 날들도 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돌아보는 것도 괴롭고, 어떻게 살아 갈지를 찾는 것도 괴롭다.
이런 괴로움은 우리가 뱀이나 거미, 물이나 어둠과 같은 것에 공포를 느껴 위험을 방지하는 진화를 한 것처럼 우리의 멘탈을 보호한다. 과도한 후회에 매몰되지 않게 하고, 쓸데없는 기우에 빠지지 않게 한다.
우리가 운동을 안 하고, 살이 쪄서 힘든 게 아니다. 우리는 '원래 삶은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DNA가 있다. 그래서 힘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삶의 어려움'을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돌린다. 과식하고, 운동을 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로 풀고, 무계획적이고, 의지가 부족하고, 방법을 모르고, 시간을 낭비하고, 원칙이 없고, 배우려 하지 않고, 비정상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고, 무기력하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원래 어려운 것'이다. 우리 몸의 '프로그래밍'은 '힘든 삶'이라는 '백그라운드'에 상주한다. 그래서 외계의 행성을 관측할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 몸은 기아와 공포가 가득한 삶을 기본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나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어떤 문제도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문제의 책임을 스스로 지려고 한다.
유방암이 생겼다고 하자. 그게 '나' 때문인가? 내가 평소에 운동을 안 하고, 음식을 가려 먹지 않고, 성질을 잘 피워서 암이 생긴 것인가? 수유를 제대로 안 해서인가? 브래지어를 착용해서인가? 피임약을 먹어서인가?
임상적으로는 원인을 지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암이 왜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크고 작은 변화를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게 나 때문인가?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몇 세대전 조상이 물려준 유전자 때문일 수도 있다.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차고 넘쳐 스스로 몸과 마음을 오랫동안 학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냥 생긴 것이고 그뿐이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그렇게 느껴진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지금이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앞으로가 불안한 것도 모두 나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원래 그런 것이지 '나 때문'은 아니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은 원래 힘든 것이다. 지금의 내 모습 때문에 삶이 힘든 것이 아니다.
원래 힘든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적응을 한 것이다. 과거 원시 조상들이 매일매일 살아 남기 위해 적응을 했듯이 우리도 적응을 하고 있다.
다만 '조상의 시간'은 매우 길었고, '우리의 시간'은 매우 짧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우리 몸이 '우리의 시간'에 맞는 적응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나 때문'이 아니라 '원시의 몸'이 '현대의 삶' 속에서 부조화를 겪는 것이다. 이 부조화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 많은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다.
예쁜 몸을 만들기 위한 실천의 핵심은 '삶의 어려움'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삶 속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가 '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삶처럼, 혹은 스마트폰 속 SNS에 보여지는 삶처럼 2D의 삶이 아니다.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단편적인 삶이 아니다.
프레임 안에서 2D로 보여지는 삶은 예쁘고 아름답다. 하지만 진짜가 아니다. 진짜와 단절된 2D 형태의 '단면'일뿐이다.
프레임 밖의 진짜 삶은 어떤가? 너저분하고, 정리되지 않고, 값싸고, 소박하다 못해 처량한 '평가 가능한' 모습이다. 프레임으로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자신의 실제 가치와 현실의 부조화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이럴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삶을 숨기고 점점 평면의 프레임 안의 삶에 집착하는 것이다. 마치 오랜 시간 힘든 삶에 적응한 원시의 몸이 현재의 라이프 스타일을 만나서 느끼는 부조화 같은 것이다.
우리가 2D의 삶에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나약함'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프레임이 작고, 보여주는 시간이 짧을수록 '해야 하는 하기 싫은 것'을 피할 수 있다.
우리에겐 거부할 수 없는 인생의 짐이 있다. 거부할 순 있지만 거부하지 말아야 하는 과제도 있다. 크고 작은 문제와 과거의 선택이 남긴 찌꺼기가 있다. 누가 물려준 것인지 모르겠는 유전자도 괴롭고, 똥밭 같은 현실에 적응하는 것도 편치 않다.
'나 때문'은 아니지만, 삶은 힘들고, 나는 '나약'하다.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예쁜 몸'을 갖기 위한 대전제이다.
그래서 '너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모든 방법을 거부해야 한다.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방법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술수'이자 '기법'이다.
'노오력'이 부족하고, 뭔가 잘못을 했을 거고, 능력이 없거나 애초에 '감'이 아니라거나, 팔자가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 삶을 너무 쉽게 가정하거나, 장밋빛으로 전제하는 방법도 조심해야 한다. 우리 삶은 원래 어렵다. 인간은 삶을 어렵게 살아가게끔 생겨먹었다. 절대 쉽지 않다.
그런데 쉽다고 말하고, 잘 될 거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 도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잘 표현한다. 과거 자식은 중요한 노동력의 원천이고 재산이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많다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결코 쉬운 인생은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나약함을 '챌린지' 하는 방법을 거부해야 한다. 엄청난 의지와 노력과 희생을 해야 하는 방법은 우리는 실천할 수 없다.
본능을 역행하고, 몸을 위기에 빠뜨리고, 관계를 단절시키고,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어 파괴하는 일을 우리는 할 수 없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방법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거부해야 한다.
질적으로 아름다운 삶 - 그러니까 몸과 생활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삶을 위해서 그 방법은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완전 진짜며,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다. 삶은 죽기 전까지 어려울 거고, 우리도 죽기 직전까지 나약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유지하고 지속하려면 '예쁜 몸'의 대전제를 인정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그 방법은 포장과 미화가 1도 없다. 조금 불편하고, 때론 허탈하고, 뭔가 힙하지 않을 수도 있다. 궁극의 왕도를 찾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다지 매력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담컨데 이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다. 평범한 중년의 인간이, 힘든 삶 속에서, 나약한 몸과 마음으로, 스스로를 자학하지 않으면서, 실천을 지속하여, 예쁜 몸과 삶을 갖는 것은 그에 합당한 사실적이고 불편한 방법 밖에는 없다.
몇 주 동안의 프로그램 이후 좌절과 자학으로 더 힘든 삶에 빠져서 의지를 불태우고 싶다면 얼마든지 좋은 방법을 추천해 줄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나 때문은 아니지만 삶은 원래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약한 자신에 맞는 방법을 오래도록 지속하는 것이 매일매일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이젠 기준을 스스로에 두고 판단 해보자. 그러면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