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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 Oct 04. 2022

바로 당신이 주인공

1인용 리클라이너가 놓인 베란다

여느 때와 같이 집사 남편의 집안 정리 프로젝트가 계속되고 있던 어느 날, 섹션 별 정리 작업에 이어 구역 별 가구 배치에 변화를 주는 작업이 동반 진행 중이었는데 퇴근하고 온 나를 그가 작은 방으로 급히 호출했다.


"뭐 바뀐 거 없어?"라며 한껏 상기된 표정이었다. 빨리 알아차려야 김이 새지 않는 법인데 아무리 둘러봐도 바뀐 것이 없어 보였다. 그가 실망하려던 찰나, 아하! 뭐야, 우리 리클라이너가 베란다로 쫓겨났네~!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의 집에서의 일이었다. 남들 다 있다는 리클라이너 의자가 나만 없다며 툴툴거렸더니 마음 약한 그가 내 입에서 리클라이너 의자를 세 번째 언급되던 날 나를 조립식 가구점으로 데려갔고, 마음에 쏙 드는 리클라이너 의자를 하나 들였다. 매장에서 이렇게 저렇게 앉아보고 내 몸에 딱 맞는 것을 고르고 고르다 보니 생각보다 부피가 큰 것을 선택했지만, TV 보며 휴식을 취하는데 이만한 것이 없다 싶을 정도로 활용도는 만점이었다.

하지만, 이사 오고 나서부터가 문제였다. 리클라이닝 기능이 내장되어 있는 소파를 새로 장만하면서 이 1인용 리클라이너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소파 옆 쪽으로 꾸역꾸역 자리를 마련해서 덩그러니 놓아 보았지만 영 어울리지 않았다. 버리기에는 너무 새것이었고, 중고 사이트에 판매한다고 해도 이 무거운 걸 누가 가져가겠냐며 일단 두자고 결론을 내었다.


본래의 유용했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집안 한 구석에서 애물단지 노릇을 하고 있던 리클라이너가 생각지도 못하게 베란다에서 자리를 찾은 것이다. '음, 그렇지. 작은 방 베란다 물건을 창고로 넣었으니 공간이 생겼겠구나. 여기가 딱이네!'라고 짐짓 생각하며 그에게 '엄지 척'을 날렸다.


며칠이 지나고 어느 주말 저녁 무렵, 유난히 화창했던 하루가 저물며 어스름하게 분홍빛 노을이 집안을 따뜻하게 감싸던 때였다. 거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막 깨어나 비몽사몽 간에 남편을 찾아보는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밖에 나갔나?'라고 생각하던 순간 그의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들어서니, 다름 아니라 그는 너무나도 편안한 자세로 작은방 베란다에 놓인 리클라이너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여보, 여기 이렇게 뒤로 기대면 앞 집도 안 보이고 오로지 하늘만 보인다! 자, 앉아봐. 되게 좋아! 여긴 앞으로 나만의 공간이야."


해사한 웃음을 만면에 띄고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그를 나는 그만 두 팔로 와락 안아버렸다.


본인은 앞으로 집사를 하겠다며 결심하던 호기로운 모습은 사라지고 어딘지 모르게 살짝 지쳐 보이던 참이었다. 이렇게 자그마한 공간 안에서도 충분히 만족을 느끼는 사람인데, 그동안 왜 그만의 공간을 만들어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솔직히, 그이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 가족 일이라면 뭐든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일사천리로 처리했던 우리 집안 '홍반장'도 가다가다 힘이 들고 지칠 때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을 텐데, 집안 곳곳을 와이프에게 양보하고 본인이 비로소 찾은 곳이 그곳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이제껏 인생의 변곡점마다 본인만을 위한 이기적인 결정을 하기보다는 가족과 주변 사람을 먼저 배려하고 양보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 주인공이 되어 화려한 조명 아래 서는 것보다 조연을 자처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았던 사람.


그가 이른 은퇴를 선언한 건 어쩌면 그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기 뜻대로 내린 결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집사 남편으로서 현재가 가장 행복하다고 하니,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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