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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ug 13. 2022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길을 잃었다.

10일 여행의 시작, 1일 차 이야기


브런치 메인/ 다음 메인에 노출되었어요. :) 감사합니다아!

지난날의 메모들을 꺼내 글로 정리하고 싶은 요즘이다. 내 생각들을 글로 꺼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둥둥둥 떠다니는 생각은 실체가 없는데, 글은 눈으로 보이니까 내 머릿속의 것들이 정리되는 느낌이라 좋다. 어질러진 방청소하는 느낌? 이 여행 방청소도 깨끗하게 마무리하기를 바라며.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 여행의 이유/김영하




친구가 유럽에서 몇 달 살기를 할 무렵, 나도 시간을 맞춰 연차를 내고, 그 여행 일정에 10일간 함께 하기로 했다. 런던 쇼디치. 사실 내게 여행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디 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 게, 처음 가는 곳은 처음 가 새로워 좋고, 한번 다녀왔던 곳은 익숙해서 좋고. 또 그 안에서 사소하게 잘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에, 여행지나 음식이나, 무엇을 하는지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최소한의 계획은 세우고 갔다. '하루에 하나씩만 내가 하고 싶은  하기'

딱 하나씩만. 여러 계획을 세우다 보면, 그것들을 지켜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서 날 더 힘들게 만든다. 물론, 계획들을 하나하나 실행할 때마다 뿌듯함도 함께 느끼지만, 그것들은 기억에 남지 않았다. 드라마 결말을 스포 당하는 느낌이다. 내게 계획이란 그런 것.

우당탕탕 여행 짐 싸기. 캐리어를 열면 짐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 뭐 공항에 시간 맞춰 잘 도착했으니 만족해. 평소에 현실 정신을 좀 놓고 다니는 스타일이라, 렌즈를 안 가져온다던가 여행 가는 날짜를 잊는 다던가 그럴 때가 있다. 숨기고 싶은 나의 모습. 그래, 그것도 나다. 받아들였다.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그런 실수는 없었다.


기대지 마세요.

타인에게 기대지 마세요.

스스로 일어나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나의 의견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상대방의 마음도, 주변도 볼 수 있는 것 같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랬다.

악명 높은 에어 차이나를 탔다. 사실 표를 끊어놓고 알았다. 악명이 높다는 것을. 타기 전에 얼마나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보고 들었는지,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럴 거면 표를 바꿨어야.. 근데 의외로 괜찮았다. 상상을 너무 실감 나게 했던 듯하다. 오히려 좋아. 그리고 이미 여행 준비로 에너지가 방전 났기 때문에 잘 잤다.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 여행의 이유/김영하

1시간 50분 대기. 하고 다시 출발!

  정리했던 메모들을 펼쳐보자면 이랬다. 수정한  없는    그대로의 메모다.ㅎㅎ


옷을 너무 많이 챙겼는지

언더그라운드 계단에서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런던신사 3명을 만났다.

건장한 신사가 자기 갈길 가더니 

갑자기 돌아와서 내 짐을 옮겨주었다.

가던 길을 가다가 돌아오는 거면... 감동 2배다.

지하철 문 앞에서는 다른 신사가 짐을 옮겨주었다.

내리는 역 한 정거장 전에 이리저리 눈치를 보니까

신사가 자리도 내릴 거니까,

너는 가만히 있으라는 듯한 찡긋을 하셨다.

 스윗..!!!!


..쏘 스윗 할 때가 아니었다..




문제는 어디서부터였을까. 어떻게는   거야 라는 생각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긍정적인 면도 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부정적이었다. 근데  사실을 결국, 마지막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내가 길을 잃지 않았더라면 여행에 돌아와 글로 남길 에피소드가 없었을 거야."


?


언더그라운드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면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숙소가 있어야 했다.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숙소도 친구도 보이지 않지? 친구가 카톡으로 아바타 조종하듯 나에게 길을 알려줬는데 .. 도착한 시간11시가 넘은 밤이었다. 진짜 너무너무 무서웠던 건, 런던 신사는  들어가고 무서운 신사들만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는 거다. 기분이  이성을 지배해 버렸다. 핸드폰 배터리는 사망 직전,  멘탈도 마찬가지. 같은 공간에서 숙소까지 2분이라고 했다가 1시간 2분이라고 했다가.. 핸드폰이 이상한 건지 와이파이가 이상한 건지  손가락이 이상한 건지..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여행의 이유/김영하



그렇게 핸드폰 배터리도 방전했다. 핸드폰이 꺼졌다..'어떻게든 잘될 거야'  신념이 무너진 순간. 사람이 많은 골목은  골목대로 무서웠고,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골목은 그대로 무서웠다. 그러다가 친절해 보이는 노부부 분께 숙소 위치를 물어봤는데, 아실리가 없었다. 그런데  좋게도,  노부부가 헤매던 길목   사장님과 나를 연결시켜주셨다. 정녕 어글리 코리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영업시간이 끝나서 친구들끼리 한잔 하고 계셨던 듯했다.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할  있었고 물도 마실  있었다. 감격스러운 순간.

잊지 못해 THE FOX... 아직도 선명하게 내 머릿속에 한 컷.

생명수와 생명줄을 얻고 마음의 안정을 을 무렵 친구가 THE FOX 와주었다.  뒤로 나는 혼자 해외로 여행 가는 일이 없었는데, 다시 한번 가게 된다면 최소한의 계획은 꼼꼼하게 세울 거다. 예를 들면 숙소 가는 ..! 마음의 평화는  안에 있다고, 안정감을 얻고 나서  런던의 풍경은 고세 아름다워졌다. 무서웠던 공간에서 자유로운 공간으로 변하는 마법.


나의 신뢰는 그의 환대로 돌아왔다.
낯선 이를 신뢰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여행의 이유/김영하


- 이번 여행 때 나는 여행의 이유, 어린왕자 책을 가지고 갔다. 여행의 이유는 공항에서 봤고, 어린왕자는 집에 돌아와서 봤다. 책을 볼 때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생각이 담긴 이 어떤 이야기들이, 이 오래된 것들이 과연 내게, 내 삶에 쓸모가 있을까. 결국엔 한 생각으로 종결한다. 내 내면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내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준다. '어떻게든 잘될 거야'의 원천인가?


맞아. 어떤 집이나 별, 그리고 사막을 아름답게 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오직 껍데기일 뿐이다.
가장 소중한 것은 보이지 않아.

- 어린왕자/생텍쥐페리





하늘이 흐려도 괜찮았다. 내 마음이 편안했으니까. 시간이 오래 흐른 뒤에 이 여행을 나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실수투성이었지만 스스로 선택했던 첫 여행이었다고. 타인이 아닌,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나씩 하나씩 하루를 채워나갔던 여유로운 여행이었다고. 서서히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감사한 시간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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