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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olo May 13. 2024

난 곳을 잃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하여 (해외이직기)-2

인생 2막, 머나먼 체코에서

1편 https://brunch.co.kr/@paolo/31


1. 난 곳도 아직 다 알지 못한 채, 난 곳을 잃었다. 이런 잃게 됨에는 큰 용기와 인생을 바꾸고자 하는 거창함이 적어도 내겐 필요치 않았다. 사실 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여러 산업을 종횡무진했던 내게 이직이 가진 의미는, 인생을 바꾸기 위함이 아니라 '재미'를 찾고자 함이었으니. 

 허나 다소 낡아진 젊음 속에서 깨달은 것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 틀린 장소에서 나의 답을 찾고자 했다는 것이었다(백조 무리 속에 있는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가 결코 될 수 없지 않은가).

어쩌면 섣부르다고 보였던 나의 이직들은 그 순간만큼은 나에겐 최선의 선택이었고, 순간에 최선을 다함은 일말의 후회를 남기지 않았다. 상처투성이가 되었을지언정 말이다. 


2. 낯선 이방인으로의 재미났던 경험이 문득 생각난다. 구겨집어 넣어 살아간 시간들을 그래도 버티게 해 주었던 것은 지나간 젊은 시간 속의 '재미'였다. 아무런 계산 없는 진솔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 인생을 바꾸기엔 진부하지만 충분한다는 말을 다시금 느낀다. "너는 백조같이 겉으로는 우아하게 보이려고 하지만, 물속에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발을 차는 것 같아". 

 발가 벗겨진 기분이었음에도 고마웠던 것은 나만 아는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주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난 곳에서는 다시는 듣지 못할 말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을까. 솔직함이 아둔함이 되는 곳에서, 진솔함은 세련되지 못하고 마치 능력이 떨어지는 듯함으로 비쳤다. 필요 없는 곳에 필요 이상으로 힘을 쓰는 아마추어처럼. 나는 아마추어였나 보다 많이 떨어지는.


3. 그럼에도 난 곳을 떠나리란 생각을 해보지는 못했다. 나의 우둔함 때문인지, 나는 외눈박이처럼 한 곳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 재미와 난 곳에서의 '리듬'을 교차시킬 수 있을 거라 자신 만만했었다. 아마 경험 없는 젊음의 패기였을 테다. 나의 자신만만함은 역설적으로 이직을 거듭할수록 쇠약해졌다. 큰 기대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힘을 잃었다. 그 자리는 슬픔이 채웠을 테다. 박자와 리듬이 정해진 악보에 몸을 맡겨야 함을 나는 그렇게 늦게야 알게 되었다. 앞으로 걸어야 하는데, 발이 좀처럼 떼지지 않았다. 재미는 이렇게 잊어야만 하는 걸까? 그저 앞으로 걷기 위해서.


4. 나는 타고난 역마살 덕분에 부지런히 걷고 걸었다. 나의 업 또한 나의 타고남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해외영업을 택한 것도 아마 밖으로 걷기 위함이었을 테다. 나의 분명한 이 색깔은 어릴 적부터 군중 속에서의 엉뚱함과 특이함과 다름없었나 보다. 남들은 다 버리는 지난 엽서와 메모지, 그리고 영수증조차도 필사적으로 간직하려고 했던 것 또한 말이다. 이유 없는 행동은 없다. 이유 없는 말이 없듯이. 

 나는 단지 기억을 붙잡고 싶었다. 언젠가는 잃게 될 기억이겠지만, 그 언젠가까지는 나를 지탱해 줄 테니. 문득 고등학교 졸업식날이 생각난다. 성인이 됐다는 해방감과 기쁨보다는 이 친구들을 이제 다시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10년도 더 지난 그때의 기억의 조각들이, 어제의 일처럼 떠오르는 것은 이런 나를 잘 지켜왔다는 게 아닐까. 이런 내가 어떻게 지난 '재미'를 잊을 수 있을까?.

'낯선 장소에서 낯설지 않게 수영을 하는 것 또한 살아가는 재미다'


5. 앞으로 내달리기도 천근만근인데, 끌고 갈 기억들은 쌓여서인지 무겁기만 하다. 타고난 욕심 탓에, 그래도 앞으로 가고는 싶나 보다. 오리도 날 수 있음을 백조에게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보여주고 싶음에, 남들 같음에 더 이상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았다. 둥지를 바꿔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한참을 서성였지만 난 곳에서 나의 행복을 찾기는 어렵다는 것을, 불행과 행복사이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이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미운오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기대할 게 없음이 꼭 나쁘지 않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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