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olo Jul 18. 2024

난 곳을 잃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하여 (해외이직기)-9

인생 2막, 머나먼 유럽에서

장소가 바꾸는 것은 여행이 아니었다. 쉽사리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 멈춘 시간에 오직 변해지는 것 또한 나였으니. 고향의 모순이다. 이 현실을 정말 부정하고만 싶은데 부정할 재간이 없다. 고향을 다시 떠나야만 했다. 고향이 그리워서 왔지만, 고향을 위해서 고향을 떠난다. 결국 모순의 모순이다. 적고 보니, 너를 사랑해서 떠난다로 읽힌다. 사랑하는데 떠날 수 있나? 그런 사랑도 존재할 수 있음을 알려준 것 또한 '시간'이다. 나는 이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하나. 바라볼 때만 아름다운 것들도 있다. 나의 고향도 내겐 그랬다.


9편 


1. 나의 고향을 나는 바라보기로만 했다. 난 곳의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기억하고픈 어쩌면 아주 단순한 이유에. 살아갈 순간에 마주할 아름다움이 앞으로도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일에 있어서도 직장 생활에서도 그런 아름다운 순간은 있을 것이다, 아니 있어야만 한다. 아름다움인지도 몰랐던 지난 순간들을, 그 시간들을 여전히 나는 추억하지만 지난 시간에만 이 몸뚱이를 맡기기엔 이 삶이 너무나 버겁다. 시간은 이리 앞만 보고 자꾸만 흐르니, 아무리 뒤를 돌아보더라도 잘 보이지 않는 순간은 언젠가 오고 말 테다. 이 올 수밖에 없음은 너무나 분명해서인지 나는 식은땀부터 미리 흐른다. 살아가면서 가지는 대부분의 걱정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데, 천성인지 나는 걱정투성이다. 바라볼 수 있음에도, 마치 못 보는 냥 서글퍼진다. 아름다움 속에 있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잃을까 하는 바보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2. 고향은 그렇게 떠났다. 이직은 직장의 떠남이기도 하지만, 나의 아주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해외이직기 9편에 이르기까지 끄적여진) 시간의 떠남이다. 장소는 시간 속에만 있다. 문득 졸업한 지 10년도 지난 고등학교를 불쑥 찾아보았다. 건물은 그대 론데, 사람은 온 데 간 데 없다. 잘 살펴보면, 결국은 시간이 떠난 거다. 인연이 오고 가듯, 이 시간이란 놈들도 오고 간다. 시간을 한평생의 벗으로 삼을 텐가?. 이런 생각들과 더불어 살기엔, 내 몸뚱이가 난 곳인 대한민국이 너무나 무겁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인연의 맺고 끊음에 무정해지는가 보다. 그 많던 정들은 어디로 갔나. 소년과 청년을 이끌던 수많던 따스함 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힘주어 살고, 힘들여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이런 따스함을 찾는 건 진정 사치인가. 


3. 그럼에도 손에 꼭 쥐고 싶은 것들이 있다. 진정성 있는 즐거움이 깃든 찰나의 순간이 내겐 가장 소중한 것 같다. 남들처럼 살아보려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도 있다. 진정성 없는 즐거움이 내겐 좀처럼 몸에 맞지 않는다. 아무리 무심해지고 그러려니 살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이런 나를 아는데, 어떻게 남이 되나. 그러니 옛 어른들은 자기 그릇을 알라고 했던가. 나는 그 그릇을 알기에, 나의 텀블러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 지도 모르겠다. 같은 장소, 같은 자리 그리고 같은 시간 일 때만큼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34년의 인생에서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근데 그 시간이란 놈이 내게서도 자꾸 오고 가려한다. 한평생의 벗으로 대하려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창가의 이 자리를 찾는다. 분명 자리도, 메뉴도 다 같은데 내가 찾는 '그 시간'과는 다르다.

Bilker Allee 126, 40217 Düsseldorf


4. 대한민국, 부산직할시 사하구 괴정동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괴정동 사하구 부산직할시, 대한민국을 떠나아만 함을 직감했다. 진정성 있는 즐거움을 위해, 아니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나는 태어난 곳을 잃어야만 함을 확인했다. 떠난다라는 말에 영원함이 깃들었던가. 떠난다는 말에는 꽁꽁 숨겨진 원초적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인지 고향을 떠난다란 말은 고향이 그리울 거다로 들리기도 한다. 떠난 고향이 그리워,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다시 떠났다. 떠남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니 나는 내가 난 곳을 '잃어야만' 한다. 시간을 한평생의 벗으로 삼고 싶기에, 나는 난 곳인 대한민국을 잃어야만 한다. 한 끌의 따스함과 즐거움이 시간에 깃들 수 있길 바라는 아주 단순한 마음으로 말이다.


10편 계속



이전 08화 난 곳을 잃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하여 (해외이직기)-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