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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kie Aug 28. 2023

30일간 현금만 쓰기 (캐시 스터핑)

카드 밖에 모르던 바보에게 바보가

우리 회사에는 월급날이 되면 급여를 모두 현금으로 인출하는 전설의 선배가 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모두의 반응은 급여일에 너네 집에서 파자마 파티하면 되겠다, 라며 깔깔거리다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2년 후 나는 알게 되었다. 그게 모두 그 선배의 빅픽쳐였다는 것을. 


어느 날 팟캐스트에서 미국에서 Cash stuffing 이란 것이 유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유행은 틱톡에서 시작되었으며...'로 시작된 그 에피소드에 대해 '현금을 들고 다니는 게 더 이상해진 요즘 시대에 다시 현금을 쓰는 게 유행하다니 신기하네'라고 생각하며 마저 하던 설거지를 끝냈다. 


영원히 현금만 쓸 거 같던 일본에도 Cashless (캐시리스)라는 말을 자주 보게 된다. 호주에서는 모든 결제를 애플페이로 하지만 교통카드는 따로 가지고 다녔어야 했는데, 이곳에서는 몇 년 전부터 아이폰 하나만 있으면 교통카드, 편의점, 모든 결제를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애플 만세. 


그러나 사람은 자고로 베란다에 자연풍경을 담아야 한다며 교외 지역에 사는 나는, 그 덕에 밖에 나가면 반드시 현금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모든 가게가 현금만 받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가게가 카드 결제가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가끔 현금 결제를 해야 할 때 도심에 살아서 현금을 잘 가지고 다니지 않는 동료들에게 '카드로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라며 선심 쓰는 척 현금을 빌려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건 덤이다. 어쨌든 지갑이 없던 나에게 현금은 번거로운 것이며 어쩔 수 없고 될 수 있으면 안 들고 다니고 싶은 그런 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망의 파이낸셜 플래너와의 경제 상담을 하게 된다. 먼저 가계부 어플을 연단 위로 보면서 소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기타' 항목에 몇백만 원이 있었고, 이 항목의 돈은 어디로 갔냐는 질문이 들어왔다. '이사비용인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하니, 세상에나 이사비용은 다른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럼 이 돈은 어디로 간 건지 다시 질문이 들어왔다. '글쎄요... 누가 횡령했나? ㅎ... ' 라면서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이게 청문회가 아니면 뭐람. 


그 후 '나의 인생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이 시작되었다. 몇백만 원이나 어디에 쓰인지도 모르고 매달 카드값을 채우며 살다니. 그저 나는 빚 없고 카드값이 월급보다 크지 않으면 크게 저축은 못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현금으로 결제하는 건 멋있지 않고 어색하며 비효율적이라 생각하며 여태 거의 애플페이와 카드로만 결제하며 살았다. 그러니까 멋있어 보이려고 카드를 쓰며 살았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요.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몇 달 전에 들었던 현금만 쓰는 미국의 틱톡커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캐시 스터핑'이라고 했지. 유튜브에 검색을 해보니 현금으로 인출한 자신의 급여를 클리어 포켓에 카테고리 별로 열심히 나눠 담고 있었다. 무슨 기준으로, 몇 주 치를 넣는지는 모르겠고, 공통점은 다들 손톱이 화려한 것뿐이라, 일단 캐시 스터핑을 하려면 손톱에 뭘 붙여야 되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번에는 급여를 현금으로 뽑아 카테고리별로 사용하는, 캐시 스터핑을 한 달간 해본 이야기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카드 대신 현금을 쓰기 시작하며 급여의 절반을 저축하게 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참고로 나는 본가에 살고 있지 않다. 한국에도 살고 있지 않다. 











캐시 스터핑이란 무엇인가?


미니멀리스트답게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급여를 현금으로 인출해서 소비 카테고리별로 분류해 놓고 쓰는 것이다. 현금을 분류하여 보관하는 곳은 종이봉투도 있고 통장지갑에 넣어두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은 두꺼운 다이어리처럼 생긴 바인더에 보관해 두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나는 괜히 물건을 새로 사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꼼수를 써봤지만 실패하고 결국 a6 사이즈의 클리어파일이 열몇 장 들어있는 바인더를 구입했다. 


월급날이 되기 전에 공과금, 주요 소비 카테고리, 비상금 및 원하는 작은 목표를 위한 저축금액을 정해둔다. 그리고 현금을 보관할 종이봉투나 바인더에도 각각 카테고리를 적어둔다. 월급날이 되면 은행에 가서 현찰로 인출하는데 얼마짜리 지폐 몇 장을 정해두고 창구에 직접 가서 받아와서, 각 카테고리별로 현금을 나눠서 채워 넣는다. 그리고 현금을 잘 쓰면 된다. 물론 봉투 속 현금이 바닥나면 게임 오버. 


온라인 결제 등 부득이하게 카드를 쓸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카드값 결제일이 되기 전에, 카드 사용 내역이 반영되자마자 입금하여 바로바로 카드값을 결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온라인 결제는 잘 안 하게 되고, 하더라도 몰아서 하게 되니 그동안 충동구매를 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심플하게, 소비의 미니멀리즘


나에게 역 근처 잡화점과 식료품점은 알라딘의 마법 램프 같은 것이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가게에 스르륵 홀려 들어간다. 미니멀리스트라 다행히 물건을 충동구매하지는 않지만 먹을 것이나 조미료, 수입식품을 야금야금 하나씩 사다 보면 나의 앞으로의 3개월이 가난을 면치 못한다. 


지금은 어느 정도 계획을 세우고 나간다. 오늘은 운동을 갔다가 외식을 하는 대신에 새로 생긴 빵집에 들러서 빵을 사 와야겠다, 오랜만에 역 근처에 나가니 그곳 마트에서 수입 식재료를 둘러보고 와야겠다, 등등. 여행에서는 좀 더 무계획적으로 행동하고, 또 그게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동네 안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생각에도 없다가 충동적으로 사 먹는 것보다, 한 주 동안 먹고 싶었던 것과 가고 싶었던 가게에 가서 소비하는 게 더 큰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최근 물건을 중고거래로 처분하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일본에 이사 와서 산 물건의 최소 절반은 다시 되팔았다는 것이다. 이게 있으면 편리하지 않을까? 최근에 이걸 자주 쓰니 이 도구도 있었으면 좋겠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일단 당장 집어치운다. 이미 있는 물건으로 가능한 방법이 없는지, 최소 2주는 고려해 보고 소비를 결정한다. 해외의 어떤 나라에서는 '쇼핑'이 오락이자 취미가 아니며,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 사는 것뿐이라는 글을 얼마 전에 읽은 적이 있다. 나 또한 얼마 전에 아웃렛에 갔다가 할 게 없어서 바로 집에 돌아간 적이 있다. 돈으로 끝없이 더하는 게 아닌, 필요한 부분만을 채워나가며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재미를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가치가 없는 것은 가차 없게 


갑자기 뜬금없이 고급 중화요리집의 테이블을 돌려보고 싶다며 혼자 고급 중화요리점에 예약해서 빈 테이블을 돌렸던 일이나, 오르막길도 없고 짐이 많은 것도 아닌데 굳이 전기 자전거를 사겠다며 예산의 두 배는 족히 넘는 자전거를 산 일이나(심지어 그 자전거는 얼마 전 물에 푹 잠겨서 전기 없는 전기 자전거가 되었다!), 그 외에 여기에 다 적지 못할 만큼 부끄러운 소비 경험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내가 어디에 시간을 썼는지 기록하다 보니 셰어하우스에서 매일 모두에게 요리해 주는 시간이 낭비라고 느끼고 바로 그만두었던 일처럼, 현금으로 지불하고 매번 기록하고 매주 계산해 보니 이건 낭비라고 생각되는 소비도 많았고, 각종 서비스와 물건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물론 시장의 어떤 논리에 의해 결정된 가장 합리적인 가격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아주 저렴하다고 느끼는 소비일 수도 있지만, 내가 가치가 없다고 느끼면 가치가 없는 것이며 소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걸 깨달은 덕분에 가치가 없다고 느낀 것은 가차 없이 소비를 멈추었다. 





개인 금융과 경제에 관심을 갖게 되다니


개인 금융과 경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내가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소비만 적절히 조절하며 연봉이나 올리며 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캐시 스터핑의 돈 세는 소리를 asmr로 듣다 보니, 저절로 개인 금융과 경제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개인 금융은 주식이나 채권 같은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일단 시드머니를 만들기 위해서는 돈을 쓰는 방법과 버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저절로 안 쓰고 모이면 좋겠지만 소비에 대한 이 세상의 유혹은 차고 넘치니까. 그리고 은행에 잠들어있는 돈은 시간이 지날수록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가치가 하락하니 투자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유레카! 물론 리스크는 알아서 잘 계산하자. 


유튜브에서도 개인 금융에 대해 말하는 유튜버의 영상을 보게 되고, 넷플릭스에서도 개인 금융에 대한 영상을, 심지어 책과 뉴스레터까지 구독했다. 투자 책을 사도 몇 페이지 들추다 말았는데 진작 현금 쓸 걸 그랬다. 경제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이 뭔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모든 영광을 저에게 파이팅이라는 한마디로 모든 결론을 집약해서 말씀해 주신 파이낸셜 플래너님에게 돌립니다. 











소비를 줄이라는 말만큼, 그럴 시간에 소득을 늘리라는 말도 자주 들었다. 어쩌면 진짜 필요한 것은 주식이나 부동산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투자해서 자기 가치를 올리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현금 쓰기는 한 달 정도 해볼 만한 도전이자 습관이 아닐까 싶다. 필요 없는 소비를 돌아보고, 그 소비를 버리기, 한발 떨어져서 각종 서비스와 물건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미니멀리스트의 소비이며, 경제적 자유의 시작이 아닐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그동안 소비 흑역사를 써왔던 과거의 나 자신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중에는 처음으로 소비해 보는 물건이나 서비스라 몰랐던 것도 많았고, 그 흑역사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이제서라도 깨달아서 참 다행이라고 느낀다. 


책 <웰씽킹>의 초반부에는 술을 하루아침에 끊는 결심을 하고, 영상에서는 이자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을 때까지 철저하게 소비를 조절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작년의 나는 와인을 마시면서 그 구절을 읽으며, 하루아침에 술을 끊다니 시작부터 정말 대단하고 나는 못한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랬던 내가 작년 말에 술을 하루아침에 끊고 미래를 위해 소비를 절제하며 살고 있다. 살아가며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을 미니멀리즘으로 줄이고 불안이 줄어든 것처럼, 매달 최소한의 생활비를 줄이고 파악하게 되었으니 또 하나의 확신이 내 삶의 자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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