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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kie Apr 16. 2023

30일간 냉장고 없이 살기

'우리 집은 얼음 나온다'에 대한 고찰

'우리 집은 얼음 나온다'라는 광고 문구를 들을 때마다 질투가 났다. 우리 집은 얼음은커녕 한쪽문 냉장고인데. 그런 우리 집에는 얼음은 안 나와도 김치 냉장고는 존재했다. 한국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면 김치만을 위한 냉장고를 산다는 게 뭔 소린가 싶겠지만, 본가에서는 김치 냉장고에 김치를 넣고 몇 년이고 보관해 뒀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고서는, 저 김치 냉장고가 있으니 김치를 몇 년 동안 안 먹고 그냥 방치해 두는 것 아닌가? 주객전도?라는 의문을 가지긴 했지만, 나 빼고 모든 가족 구성원들은 그 김치 냉장고만은 절대적으로 사수했다. 

 

이제 김치 냉장고는 사지도, 이곳에서 팔지도 않지만, 쉐어하우스를 떠나 처음 방을 계약한 후에는 냉장고 없이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6월 초여름, 일주일간 시도하고 실패했다. 내 복숭아맛 호로요이를 냉장고에 차갑게 보존해 두고 매일 마실 수 없다는 게 분했고, 결국 무릎까지 오는 크기의 가장 작은 냉장고를 샀다.


그러다가 냉장고가 없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 계기는, 이나가키 에미코의 <퇴사하겠습니다>라는 책을 읽고 나서였다. (혹시 번역기를 돌려서 이 글을 보고계시는 우리 회사 사원분들에게 책 제목에 대한 오해가 없기를 바라며!) 커리어에 대한 뉴스레터에서 발견한 책인데, 늘 그랬듯이 몇 년 전에 나 빼고 유행했던 책이란다. 책 제목대로 일에 대한 태도와 철학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지만, 매일 전기세가 200엔(약 2천 원)이라는 내용에 무릎을 꿇었다. 전기를 적게 쓰는 편인 나도 2천 엔은 나오는데 그것의 10분의 1이라니, 의도치 않게 나보다 훨씬 극단적인 미니멀리스트를 만난 것이다. 


세상의 광고를 보고 있으면 다양한 기업들이 이 상품이 "있으면 편리하다"라고 떠들어댑니다. 그런가 싶어 사다 보면 '있으면 편리한 것'들이 어느새 '없으면 불편한 것'으로 바뀌고, 종국에는 '필수품'이 되어버립니다.

이나가키 에미코, <퇴사하겠습니다>


저자는 냉장고뿐만 아니라 가스도 없는 집에 살고 있다. 도쿄에 살면서 근처 마트의 냉장고, 목욕탕의 욕조, 카페의 테이블을 매일 빌려서 생활한다며, 집 근처까지 모두 나의 집이니 이처럼 호화로운 곳은 없다고 말한다. 


이 인상 깊은 이야기를 뇌 한구석에 보관해 뒀다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여행이었다. 며칠간 여행을 가기 전, 슈퍼에서 샀던 통통한 양배추 한 통이 남아있는데 그걸 그대로 둔 채로 집을 비워야 했다.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럼 냉동실에 넣어두면 되잖아?라고 했지만 우리 집 냉장고에 그렇게 큰 양배추가 들어갈 리가 없다. 냉장고, 양배추, 냉장고를 번갈아가면서 생각하다가, 냉장고라는 단어에 사로잡히고, 그렇게 냉장고 전원을 끄고 여행을 갔다. 만약 정말 필요하다면 여행 갔다 와서 다시 냉장고를 켜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벌써 두 달째, 냉장고 없이 살기로 이어졌다. 






비오는 날 자주 해먹는 두유를 넣은 수프, 해가 쨍쨍한 날에는 햇빛을 받으며 먹는 1첩 반상.





전기세 3분의 1이 사라졌다


냉장고 대신 아이스박스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난방이 닿지 않는 선선한 곳에 야채를 보관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여름에는 야채나 각종 생선을 햇빛에 말려서 보관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만약 버섯처럼 냉장고에 보관해야 하는 야채가 있다면 당일날 바로 요리해서 먹었다. 아니면 말린 표고버섯처럼 건조식품이라는 훌륭한 대체품을 상비해 두는 방법도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24시간 열심히 일하는 냉장고를 재워두니 작년의 같은 달에 비해서 전기세의 3분의 1이 줄어들었다. 앞으로는 절반인 만 원대까지 줄여보는 게 목표다. 냉장고를 끄면서, 그동안 필요하지 않을 때도 계속 콘센트를 꽂아두고 있던 것들은 없는지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이를테면 전기밥솥. 저녁밥을 먹으면서 밥솥을 비우고 보온기능을 꺼두는 것만 해도 충분히 전기절약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쓰지 않는 동안 아예 콘센트를 뽑아버리면 되잖아?라는 발상에 이르렀고, 밥 대신 빵이나 면을 먹는 날엔 전기밥솥은 대기하지 않고 콘센트가 뽑힌 채 며칠간 잠들어있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냉장고뿐만 아니라 자기 전에 모든 전기제품과 콘센트를 뽑아두는 경지에 이르렀다. 밤에는 전기밥솥과 와이파이 라우터, 충전기의 콘센트를 뽑고, 욕실과 화장실의 환풍기를 끈다. 가뜩이나 주변이 죽은 듯이 조용한 곳에 살고 있어서, 자려고 누우면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개구리울음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리고, 계절을 착각한 듯한 매미인지 귀뚜라미의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요즘은 봄이 되니 각종 새들의 노래 경연도 들린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소음에 둔감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다면,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굳이 소음과 전기세가 발생하는 전기제품을 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푸드 로스(food loss), 음식물 쓰레기 없는 삶


푸드 로스란, 먹을 수 있음에도 버려지는 음식들을 의미한다. 한 때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열심히 챙겨본 적이 있다. 아무리 문이 두 개 세 개에, 똑똑한 냉장고라 하더라도 이런 게 있었나? 싶은 음식이 냉동실 안쪽에서 나오고, 때로는 방송 불가한 수준으로 썩은 음식이 나왔던 회차가 있었던 걸 기억한다. 나 또한 냉장고를 과신한 나머지, 생 무화과를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까먹어서 곰팡이 천지가 되어 그대로 퇴비로 만든 적이 있다. 


냉장고가 없으면 내가 먹을 만큼만 식료품을 사거나, 건조식품처럼 냉장고가 필요 없는 음식을 상비해 둔다.  그럼에도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는 컴포스트(Compost)라는 방식으로 퇴비를 만들고, 그 퇴비를 농가에 보내 만들어진 야채를 다시 우리 집으로 배송해서 받는다. 그렇게 생 무화과 사건과 같은 푸드 로스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고, 대신에 우리 집엔 자체 에코시스템이 자리 잡았다. 






상온 보관이 가능한 건조 두 부과 팩 두부






냉장고가 없어 생기는 단점?


사실 아직 여름이 아니라 단점을 실감하지는 못하고 있다. 몇 가지 단점으로 생각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적어보겠다. 첫 번째는 냉동식품을 살 수 없는 것. 라면을 포함해 인스턴트식품은 먹지 않고, 냉동식품도 사지 않는다. 가끔 만두가 먹고 싶다면 사 와서 바로 구워 먹을 때가 있기는 하지만. 예전에는 밥을 랩에 싸서 냉동해 두고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곤 했지만, 이젠 비닐 랩도 안 쓰고 전자레인지도 없는 데다, 우리 집의 무릎까지 오는 냉장고의 냉동실은 냉동실이라 부를 수 없는 곳이다. 이제는 냉동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조금 더 부지런해져서, 매일 1첩 반상과 고슬고슬한 밥을 먹는다. 


두 번째로 고기나 생선, 달걀을 보관할 수 없다는 점. 나는 외식할 때나 가끔 고기를 먹기 때문에, 달걀, 요구르트 및 고기를 사 올 일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미니멀리스트가 요구르트처럼 냉장보관이 필요한 식품을 위해 냉장고를 다시 사게 되었다는 결말을 종종 보긴 하지만, 아직까지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있다. 여름에 시원한 수박을 먹기 위해 다시 콘센트를 꽂을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신에 건조 두부나, 팩 두부, 두유처럼 상온에서 보관할 수 있는 식료품을 상비해두고 있다. 연두부를 상온에서 몇 개월씩이나 보관해 두고 먹을 수 있다니 놀랍다 현대기술. 


마지막으로 많은 양의 장을 볼 수 없다는 것인데, 슈퍼가 도보 15분 거리 안에 있어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확실히 장을 보는 횟수는 늘어나긴 했지만, 그래봤자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고기를 자주 먹는 사람들은 매일 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도 있다곤 하지만, 매일 장을 보러 가게 되면 슈퍼의 마케팅에 홀려 불필요한 것까지 사게 되는 단점이 있다. 참, 나는 주말을 제외하고 평일 내내 전부 집밥을 해 먹는다. 메뉴는 거의 매일 1첩 반상.






술 대신 차를, 차가운 음료 대신 따뜻한 물을.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런 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였습니다. 

이나가키 에미코, <퇴사하겠습니다>


더 이상 차가운 물도 없고, 반찬이 애매할 때 냉장고 속에서 나를 기다리던 토실토실한 연두부도 없다. 하지만 냉장고가 없는 덕분에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는 삶에 대해 다시금 배워나갔다.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을 줄여나갈수록, 나는 내게 무슨 일이 닥쳐도 두렵지 않으며, 그럴수록 더 자유롭고 행복함을 느낀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냉장고에 얼린 아이스크림과 차가운 음료수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냉장고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지만, 지구 어딘가에는 사람의 체온과 비슷한 음식을 먹고, 자연의 힘을 빌려 음식을 보존하는 곳도 분명 존재한다. 당연한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면, 제한이 뒤따르지만, 그 제한된 환경 안에선 창의력이 생겨나며 나는 그것을 즐기고 있다. 세탁기 없는 삶에 이어서 냉장고 없는 삶, 그다음은 또 무엇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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