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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May 06. 2024

하루라도 그냥 놀 수가 없었다.

서른 즈음에

30대 시절의 나

어려운 가정형편에 결혼한 나는 떳떳한 직장도 없이 살았다. 결혼 직전 아무런 잘못 없이, 건설업에 손대었다가 부도 맞은 조선일보 인천지사장의 횡포로 운영하던 신문보급소를 빼앗기다시피 하는 바람에 세상을 탓하며 방황하다가 조그마한 광고회사에서 보수 없이 일하게 된 덕분에 「태양광고」라고 명칭 하여 광고성냥, 판촉물 등을 파는 장사를 터득하고 나왔다. 사무실은 집 전화번호를 사용했다 (422-3273).


가까스로 준비한 결혼준비금을 갖고 큰돈을 벌어 오겠다고 집을 나갔던 막내 남동생은 돈을 다 쓰고 뉘우치며 집에 들어와 같이 일하게 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 전화번호로 422-3273을 사용하였고, 핸드폰 뒤의 번호도 가족 모두 3273을 사용했다. 주문받은 광고성냥을 접고, 본드 칠하고 마무리하는 일을 집에서 하는 바람에 결혼한 아내도 같이 일해 주었다. 소규모 장사인 관계로 무거운 광고성냥을 직접 어깨에 메고, 들고 배달하는 과정이 무척 힘들었던 시절이었다.(광고 소성냥 1박스가 2-3.000개, 중량은 30~40kg이었던 것 같다.)


그때 살던 집

30대 결혼초기 석바위 주안주공 20동 13평 아파트(연탄난방)에 살았다. 부모님이 마련하신 집이라 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안방에는 부모님과 남동생, 우리 부부는 작은 베란다가 있는 조그마한 방에서 살았다. 좁은 신혼집이었지만 아내와 같이 있음이 좋았다. 이후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장례 치르고 빚을 지게 되어, 동암역 부근 개인주택 2층집(방 2칸)에서 전세를 살았다. 2년을 살다가 다시 주안주공아파트 18동으로 이사와 전세를 살다가 만수동 한샘빌라 지하층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집 없는 설움을 절실히 느끼며 살았던 시절이었다.


나의 30대, 가장 기뻤던 순간

소중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아들은 29살에 출생, 둘째 아들은 32살에 출생) 친척이 아무도 없었다. 나 자신에게 자식이란 너무나 귀중한 보물 같은 존재였다. 남들처럼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최대한 부모로서 할 도리는 하고 싶었다. 체면 차릴 일도 없었다. 일만 생기면 밑바닥 일까지 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나의 30대, 가장 가슴 아팠던 순간

마땅한 수입이 없던 시절이라 하루라도 그냥 놀 수가 없었다. 한창의 나이였지만 아파트경비원, 백화점 보안요원 일까지 가리지 않고 일했다. 친구들과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무척 창피했다. 그러나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시절이라 열심히 일한 덕분에 많은 주위 사람들의 믿음을 얻고 오늘까지 온 것 같다. 슬펐다. 지금 생각하면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해도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었던 나 자신이 대견했다고 본다.


내가 다시 30대로 돌아간다면..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던지, 일을 하면서 좀 더 나은 내 일을 찾고자 새로운 공부를 찾아 했을 것이다. 주위에서 어떠한 도움이라도 받을 형편이 안 되었던 시절이라 배고픔을 이기고, 아내와 자식들을 위하여 공무원, 학교 교육자 생활을 했을 것이다. 너무 허송세월을 보냈던 지난 시절을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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