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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May 05. 2024

결혼하던 날

같이 있어 행복했던..

나의 배우자는

배우자는 26살이었으며, 순수하고 착했다. 용현동 물텀벙이 거리 신화 여인숙 부근 수출품 털실 옷을 만드는 회사 검사 요원이었다. 그녀는 만수동 소방서 건너편 새마을 중국인 공동묘지아래 단독 주택에서 살았다. 처갓집에는 부모님과 처제 2명, 처남과 같이 살았다.


러브스토리

결혼하기 1~2년 전 지금은 처제가 된 여동생이 "오빠, 좋은 사람 중매를 설 테니까 만나봐!"라고 하여 동인천역에 있는 샘터다방(?)에서 첫 상면하였다. 나는 석바위 전화국 건너편에서 조선일보 신문 보급소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 후 용현동에 있는 아내 직장 퇴근 시간 무렵 되면, 그곳으로 가서 같이 수봉공원도 거닐며, 만수동 집까지 데려다주며 연애를 했다.


첫인상

첫인상도 너무나 순수하고 이뻤다. 손이 무척 하얗고 이뻤다. 큰 딸이라 집안의 살림을 걱정하면서 성장해 온 터라 너무나 검소하고 착하기만 했다.


결혼을 결심한 이유

큰 딸로 자라오며 부모님들과 동생들을 꼼꼼히 챙기는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나 또한 큰 아들로서 부모님과 동생들을 챙겨야 하는 입장이라 서로가 생각하는 바람이 맞았던 것 같다.


내가 꿈꾸던 배우자 이상형

착하고 순수하면 무조건 내 배우자라고 생각했다. 내 부모님을 자신의 부모님처럼 모시는 마음이 있으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배우자는 이상형에 가까웠나요?

당시에도 어려운 시절이지만 같이 극복하며 살 수 있다고 서로가 믿다 보니 결혼에 이르게 된 것 같다. 지금까지 만 37년 넘게 살아오며 아내를 만나 결혼한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다.


결혼하던 날의 풍경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는 청색 양복을 입었다. 1982년 4월 4일 결혼식 날은 날씨가 무척 좋았다. 친척이 없어 하객은 많지 않았다. 축의금도 그때 그 시절에는 2천 원, 5천 원이 전부였다. 1만 원을 부조한 분도 몇 분 계셨다. 결혼식날 우황청심환을 먹었다. 음식은 결혼식장 옆 한식당에서 축하객을 대접한 것 같다. 술이 얼큰한 후배가 내 구두를 바꿔 신고 가는 바람에 다혈질이었던 남동생이 "어떤 놈이 우리 형 구두 신었어?" 하고 호통을 치며 떠들어 식당을 소란하게 만든 기억이 난다.


우리의 신혼여행은

그 시절 남동생이 돈을 벌어갖고 오겠다며, 결혼식 날 아내에게 줄 패물을 찾을 돈을 갖고 집을 나가는 바람에, 친구에게 돈을 빌려 간신히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결혼식 후 양쪽 친구들과 함께 수봉공원을 한 바퀴 돌고, 신혼여행은 온양온천, 계룡산 동학사를 다녀왔다.


첫날밤 이야기

우리는 온양온천 호텔에서 보냈다. 같이 있음이 너무 행복했다. 아내는 너무 아름답고 예뻤다.


신혼집

우리 집이 너무 가난하여 주안주공 13평 아파트 작은방을 썼다. 연탄 온돌방이었다. 안방에는 부모님과 남동생이 사용했다. 방이 두 개 있는 13평 아파트 좁은 집에서 5명이 살았다. 우리는 같이 있음의 행복으로 좁은 집을 탓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내가 고마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결혼 생활

아내에게 결혼식 날 줄 패물이랑 신혼여행비가 없어 난감하던 생각••·. 결혼식 후 수봉공원에 우리 부부, 친구 모두가 소란스럽게 떠들며 축하해 주었다. 그 시절에는 결혼식 비디오테이프나 동영상이 없고 결혼식 장면을 녹화하는 카세트테이프(말만 나오는)만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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